2017. 10. 14의 기록
굿모닝, 마지막 숙소에서의 첫 번째 아침을 맞았다.
아 풍경 좋다. 하루의 시작은 일어나자마자 온갖 문을 활짝 여는 것으로 시작했다.
어제 숙소 근처를 산책하면서 발견한 카페에서 낯익은 김밥 사진을 발견하고, 아침부터 김밥을 먹으러 왔다. 식당이라기보다는 카페 같은 분위기에 음료가 주된 판매 대상이지만 생뚱맞게 김밥과 떡볶이를 판다. 카페 안에는 한국 분이 계실 줄 알았는데, 태국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줬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김밥과 아이스라테를 주문했다. 태국 언니가 하나하나 재료를 넣어 김을 마는 모습을 생각하니 이거 괜찮겠나 싶었지만, 아주 오-래 걸려서 나온 김밥은 깨까지 오솔오솔 뿌려져 있었다. 일단 비주얼 합격. 이거 이거 우리나라 김밥 천국 아주머니 김밥 마는 속도 보면 놀라 자빠지겠구먼. 맛은 보통, 나쁘진 않았다. 오이 넣은 김밥인데 내 취향은 시금치라서 그걸 제외하고는 꽤 담백하니 맛있었다. 파는 김밥보다는 소풍 때 집에서 싸주는 집 김밥의 느낌이 났던 건 왜 때문일까. 공부하는 분위기의 조용한 카페였다. 재미있게도 작은 간장 종지에 자른 김밥 하나씩을 담아서 시식 서비스도 했다. 태국 사람들 입맛에 김밥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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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을 먹고 집에 들어가 보니 문 앞에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어젯밤 나누었던 호스트와의 메시지에서, 아침 8시 30분에 조식이 제공된다고 했었는데 아침을 먹으러 9시에 나갈 때까지도 조식이 없더니만 언제 가져다 놓은 건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호스트였다. 졸지에 식은 밥을 이른 점심으로 먹었다. 근데 저 닭고기 양념 넘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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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까지 챙겨 먹고 집을 나섰다. 오늘도 날씨가 엄청 좋았다.
어제 와 다른, 처음 가보는 골목으로 걸어서 Book re:public에 도착했다. 어제 왔던 서점에 또 왔다. 좋은 건 바로 한번 더.
커다란 안경을 낀 귀여운 서점 직원 언니에게 치앙마이의 풍경이 나온 사진집 같은 게 없는지 물었더니 혹시 이런 건 어떻냐며 가져다준 책, <little chiang mai>
파일 같은 책을 펼치면, 안엔 여러 개로 분권 되어 있는 책이 있다. 자전거 타기 좋은 도로, 조깅하기 좋은 공원 소개부터 갤러리, 뮤지엄, 카페, 레스토랑, 북스토어 등등을 분야별로 나눠서 소개한 힙한 책이었다. 사진도 퀄리티 있고 꽤 세련된 구성이었다. 엄청 탐났지만 1000밧 가까이 되는 가격에 책만 뒤적뒤적, 친절한 언니가 너무 비싸니 사지 말고 여기서 천천히 마음껏 보고 가라고 해주셨다.
나중에 인스타를 검색하다 발견,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귀여운 서점 언니는 알고 보니 아티스트였다. 그것도 마침, 내가 반캉왓에 머물고 있을 때, 'gallery kang wat'에서 전시 중이어서 구경했었던 전시, 'today is Blue Day'의 작가님. 자기와 똑같은 잠자리 안경 쓴 소녀가 잔뜩 등장하는 그림의 작가님이었다. 치앙마이 참 좁다. 어쩜.
작가님 인스타에서 퍼온 그림입니다.
내가 나중에 서점을 차린다면(?) 이렇게 꾸며놓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멋진 곳이었다. 타국의 서점이 관광객에게 이렇게 편안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말이지.
오늘도 책 구입은 안 하고, 내가 가져간 책을 읽으며 타이티를 마셨다. 티 포스터가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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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만이 열쇠를 갖고 있는 우리의 첫 실험실이었다. 작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것이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랩 걸, 133p>
퇴사하자마자 이 곳에 떠나온 터라 내가 회사를 그만뒀는지, 그냥 휴가에 여행을 온 건지 사실은 아직 실감이 안 났다. 여행 중에는 생각 안 한다고 하면서도 이제 곧 여행이 끝나면 새로운 일상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신기하게도 책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를 '치얼-업' 할 문장들만 쏙쏙 뽑아내 밑줄을 긋고 있었다.
여기는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는다고 한다. 문화 충격. 교복을 입고 남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내 눈에는 참 어색하면서도 청춘드라마 같고. 막 괜히 설레는 기분이었다.
넓은 사거리 사 차선 이상의 넓은 대로에도 횡단보도만 있지 신호등이 없다. 신호등이 없다니, 흑흑. 차랑 오토바이는 또 어찌나 많은지. 건널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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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아트센터에 도착했다.
<beauty of the natural>이라는 주제의 사진전도 한쪽에서 열리고 있었다.
전시실의 크기가 크지 않아 전부를 둘러보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시보다도 창 밖의 정원이 꽤 근사해 보였다. 나가고 싶긴 한데 나가면 덥고, 그렇지만 덥다고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참 빛이 들어오는 시간, 빛과 나뭇잎이 바닥에 만들어내는 무늬가 황홀했다. 한국에서 긴 여름을 보내고 그 끝의 끝 자락에 여름 나라로 여행을 왔으니, 아마도 내 평생에 가장 긴 여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 지난 몇 년간 회사에 박혀 일만 하느라 한 여름에도 냉방병이나 걸리기 일수였는데 태국에서는 오랜만에 노출된 한낮의 더위에 연신 땀을 흘렸다. 더운걸 너무 싫어하지만 같은 땀이라도 여행지에 흘리니 여름을 만끽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빛이 너무 뜨겁게 비추면 그늘로 숨고 싶고, 계속해서 그늘에 있다 보면 또다시 빛으로 나가고 싶어 진다는 걸 설마 몰랐을까. 알면서도 빛으로 나왔다면 내리쬐는 햇살에 몸이 바삭해지는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할 텐데. 또 알면서도 그늘 안으로 숨었다면 마음까지 살랑이는 바람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할 텐데. 버티는 것도 용기고, 벗어나는 것도 용기지만 어디에 있건 그곳에서의 모습을 즐길 수 있게 되는 용기가,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했다.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퇴사가 결정된 이후에는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된 것일까. 빛으로 나가는 것은 뜨겁고 그늘은 어둡고, 그래서 어느 쪽이건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났다. 또 이 시간도 언제나 그렇듯, 살다 보면 살아질 테지만.
근처에 있는 카페에 왔다. 포스터에 걸린 시그니처 메뉴를 시켰는데 컬러랑 거품까지, 마치 맥주 같다. 빨대를 꽂아 줬길래 빨대로 쪽 들이켰더니 직원이 쫒아와서 스트로 말고 들고 마시라는 제스처를 한다. 시키는 대로 거품이랑 같이 마시니 훨씬 맛있다. 커피 맛은 아니고 이게 뭐지, 무슨 맛인지 채 음미하기도 전에 옆에 온 직원이 머뭇머뭇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말을 건다. 혹시 나 기억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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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이었다. 태국 사람이었다. 나에게 본인을 기억하냐고 물을 만큼의 관계를 가진 태국 사람이 있던가. 영 못 알아보는 눈치이자 본인이 먼저 자신이 누군지 설명했다. 자기는 GRAPH CAFE의 스텝이라고. 내가 그 카페에 갔던 날 자기도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아아아-! 그래그래. 그러고 보니 가물 얼굴이 생각난다. graph cafe와 find coffee는 세임 오너란다. 아하. 두 곳 모두 신기한 메뉴가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파인드 카페는 가격이 꽤 저렴한 편이니, 컨셉이나 주 고객층은 좀 다른 듯하다. 여하튼 여행 기간 중 누군가를 아는 체 할 수 있다는 건 꽤 신선하게 좋은 기분이었다. 먼저 와서 그리 반갑게 알은체 해 주다니 고맙고. 몇 마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기분 좋게 음료를 마셨다. 그런 얘기들을 하느라 결국 무슨 조합으로 만들어진 건지는 묻지 못했다.
밖으로 나와서 걷는데 언제부턴가 스윽- 내 앞에서 걷는 나옹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른 사원이었다. <왓 쑤안독> 가장 예쁜 사원이라기에, 만약 사원에 들르게 된다면 이 곳에 와야겠다 했었는데 마침. 온통 하얀 사원 벽에 둘러싸이자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맨 발에 무릎까지 꿇고, 저들은 무엇 저리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걸까.
사원을 나와 골목에 들어왔더니 아까 그 나옹이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저렇게 서 있었다. 여전히 내 앞에서 걷다가 갈래길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왓 쑤완덕 사원에는 승려 대학이 함께 있었는데 내 멋대로 이 건물은 기숙사일까, 상상해 보았다. 승복을 빨아 널어놓은 것이 보기 좋았다. 같은 주황색이라도 톤이 조금씩 달랐다.
꽤 아름다웠던 골목골목을 지나.
뭔가 이국적인 풍경, 저기 저 야자수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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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al project shop이라는 곳에 들렀다. 로열 프로젝트는 60년대 말 태국 농촌지역의 빈민들을 구제하고 생계를 위해 마약 농사를 하는 백성들에게 보다 건전한 생활 터전을 마련해주고자 태국 왕실과 국왕이 계획하고 지원해 온 프로젝트라고 한다. 태국 전역에 로열 프로젝트 샵이 세워졌고 이 곳들에서 로열 프로젝트를 통해 생산 또는 가공한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다,라고 다른 블로그에서 봤던 터라 숙소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했었다. 도착했더니 입구가 꽤 고급 지다. 아마 다른 곳들보다는 가격이 조금 있는 고급 마트인 것 같다. 유기농 상품들을 판매하는. 예상대로 이번 여행에 유일한 마트 구경일 테고, 결국 야시장도 못 가봤다. 쳇.
규모는 굉장히 작다. 다른 건 다 슥슥- 훑고 지나갔고 여기에 멈춰 서버렸다
찬 공기가 슝슝 나오는 쇼케이스 안에 꽃을 판다. 아 사고 싶다. 사고 싶다. 꽃의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꽃이 모두 예뻤다. 결국 아래쪽에 핑크 꽃다발을 골랐다.
나는 듯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컵을 씻고 물을 채우고 과도로 꽃대를 비스듬히 잘라 컵과 키를 맞췄다. 창 밖 풍경이, 식탁 위 풍경이 한결 풍성해졌다. 이 곳이 더 앉아 있고 싶은 장소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꽤 풍성하고 괜찮은 꽃이 무려 75밧. 2700원 조금 안 되는 가격 되시겠다. 하. 이러니 내가 안 살 이유가 없지. 꽃 하나 꽂아두고 어찌나 행복해졌는지. 음악을 틀고 테이블 위를 치우고 방을 정리하고, 주말의 오후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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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가 되어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이게 그냥 저녁 먹으러 가는 동네 길 풍경이라니. 하.
내부의 풍성한 꽃 장식과 빈티지 소품과 흘러나오는 음악과 음식의 데코레이션까지. 정말이지 이 묘한 콜라보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타입의 레스토랑이었다. 환상적으로 힙하다.
샐러드와 카레, 꺄악 너무 예뻐 너무 예뻐. 흑흑. 카레를 먹다가 석류가 톡 하고 씹힌다. 게다가 오징어 들어간 카레의 맛이 아주 기가 맥힌다. 맛맹이 인정하는 맛집. 너어무 맛있게 먹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여서 돌아가는 길도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해가 지자 밖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랩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와 불을 딱 켰는데 꺄악 꽃이 만드는 그림자도 너무 예쁜 거다. 하 행복해. 2700원의 행복.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빈둥거렸다. 뭔가 쉽게 잠들지 못하겠는, 그런 밤이었다. 오늘 나를 스친 사람들과 스친 장소들과 스친 생각을 곱씹기도 벅찬, 많은 것들로 꽉 채워 넣은 하루였다. 복잡하지만 조금 낭만적인 밤, 아마도 테이블 위에 꽂힌 다섯 송이의 꽃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