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처럼'의 행복

by 노니


패터슨을 봤다. 그 사랑스러운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행복해져있었다. 영화 속 패터슨은, 내 눈 속에서는 내내 행복해 보였다(마빈이 물어뜯은 수첩을 발견한 뒤부터 낯선 시인에게 새 수첩을 받아 들기 전까지는 빼고). 행복하지 않았을 리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패터슨은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순간순간 반짝이는 눈빛이 떠오르는 걸 막을 길이 없다. 버스 승객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 패터슨의 얼굴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싯구를 생각하는 얼굴에서, 길에서 만난 꼬마 시인의 시를 듣는 얼굴에서, 산책길에 있는 단골 바 사장과 대화하는 얼굴에서, 코인 런드리 랩스타의 무대를 보는 얼굴에서 일상의 권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패터슨의 일상에 매일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쌍둥이처럼, 소소한 일상 어디에서고 반짝이는 글거리들이 툭툭 등장할테니 그걸 발견하는 일상이 딱히 권태로울 리 없다. 발견한 글거리를, 심지어 자신 만의 시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는데 일상이 지루할 리 없다. 그 시를 읽어주고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일상이 지독할 리 없다. 라고 모처럼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은 어설프게나마 나도 그런 시간을 보내 봤기 때문이다. 어디서고 마음에 박히는 말들을 수집하고, 흘러가는 말들을 잡아두는 시간 말이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소소한 자극에도 감격하며 그 순간들을 주워 담았다. 그걸 누가 시켜서 할까, 좋아서 했지. 이 행복이 '글을 쓰고 싶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게 했다. 너무 꿈같은 얘긴가 싶어 꺼내기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쓸 만큼 용기 내게 했었다.

카페에 올라온, 작가가 되고 싶다는 어떤 분의 글 밑에 코멘트를 읽다가 왈칵 눈물이 났다.

'작가처럼'이라는 말은 복잡하고 모순적입니다. 작가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 작가처럼 산다는 것은 자기 스타일대로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정말로 작가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뜻이겠죠. 바로 지금 하고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패터슨은, 어쩌면 끝까지 자기 이름으로 된 시집 한 권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따라가며 보았다. '시인처럼' 사는 것의 행복을. 별 것 아닌 일상이 아름다운 시가 되는 과정을. 어쩌면 나도, 끝까지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는지도 모를 블로그에, 나만 재밌는 글을 올리는 게 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도 '작가처럼'의 행복이라면 이미 꽤나 누리고 있다. 그 자체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발견해서 아름다워지는 일상의 행복을.

비밀 노트가 갈가리 찢겨도 다시 텅 빈 페이지의 새 노트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월요일이 오기 때문이다. 월요일의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도, 페이지를 채워 나갈 시감은 박혀 있을 테니까. 여전히 작가가 꿈일 뿐인 백수의 내일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내일도, 계속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