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좀 예민합니다

by 노니

최근에 내가 하는 말을 녹음해서 들을 일이 있었다. 깜짝. 내가 조목조목 조리 있게 말하는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심했다 이건. 그래서, 근데, 조금, 되게, 약간, 그러니까, 뭔가, 그런 느낌? 완전, 그런 거 있잖아요, 같은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단어들이 이어졌다. 몇 분간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말은 점점 빨라졌고,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이제 와 들어보니 상대가 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한 게 신기할 정도. 실제로 나는 대화하면서 표정과 손을 많이 쓰는 편이긴 하다. 손을 묶어 놓는다면 말이 매우 어색해지겠지 생각할 만큼. 어휘력이 딸린 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건 아니지만 내가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볼 일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 좀 놀랐다. 더구나 그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 말 정말 잘한다' 감탄하고 들었던 터라, 파일을 듣는 동안 순간순간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말하는 내용은 '각각 자신이 만들어 낼 창작물을 사람으로 비유해본다면'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자기소개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를 설명하고 있는 느낌.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나를 통과한 것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거기서 내가 아주 여러 번 사용했던 단어가 있었다. '예민한', 그동안 예민하다는 말을 내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인정하게(?) 되고 나서는 마치 나의 대표적 정체성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예민하다. 인정까지만 하자. 남발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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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는 예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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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언니네와 여행을 다녀왔다. 보령에 있는 무창포 바다로. 안 그래도 바다가 보고 싶었는데 도착해보니 마침 숙소가 바로 바다 앞. 리조트 문으로 나가면 해변과 바로 연결이 되는 구조라, 진짜 원 없이 바다를 봤다.
여행 기간 동안, 언니가 형부에게 툴툴거리는 것 같다 생각이 되면 금세 형부 편을 들었다. 형부가 뭐든 너무 꼼꼼하게 챙겨 언니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싶으면 슬쩍 언니의 기분을 맞췄다. 내 나름대로, 내 생각대로 둘을 배려해서 움직였다. '형부가 준비한 여행 스케줄에 툴툴대면 형부는 서운할지 몰라', '그냥 대강하고 넘어갈 수 있는 건데 하나하나 챙기면 솔직히 언니도 피곤할 거야' 내 짐작으로 서로의 입장을 살피고 나서, 한쪽의 편을 들어 중재했다. 딴에는 모두가 편안했으면 좋겠고 누구도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다.

즐거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름 큰 역할을 했다고 뿌듯해하다가 픽- 웃음이 났다. 누가 누굴. 생각해보면 싫으면 싫은 티가 얼굴에 팍팍 드러나고, 더위에 몹시 취약한, 느리고 느긋한 처제이자 동생을 모시고 다니느라 고생한 건 언니 네일 거다. 9년 차 부부의 내공을 내 멋대로 넘겨짚고 불안해했다. 서로 다른 건 당연한 거고, 이미 그 다름에 익숙해졌고, 또 다름이 부딪힌다 해서 꼭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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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와 저녁 식탁에 앉아 엄마 아빠에게 조잘 조잘 이런 얘기를 하는데, 아빠가 말한다. "맞아, 엄마랑 아빠는 둘이 얘기 잘하고 있는데 가끔 네가 너무 예민할 때가 있어" 엄마도 거든다. "우리는 그냥 서로 그러려니 다 이해하는데, 왜 네가 예민해." 쳇. 39년 차 부부의 내공을 내 멋대로 넘겨짚었나 보다. 아빠가 투덜 투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으면, 내가 엄마라면 저런 말 진짜 듣기 싫을 것 같아서 아빠에서 톡 쏘아붙였다. 엄마가 무신경하게 아빠를 위로하면, 아빠같이 예민한 사람에게 저런 위로가 통할 것 같냐고 구시렁댔다. 하. 딴에는 혹 누구라도 마음이 덜 상하길 바라는 조바심이었는가 보다. 아주 평화주의자 납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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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예민한 걸로 됐다. 상대에게 예민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 또 상대도 나와 같을 거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는 것. 또 하나 배웠다. 넘겨짚지 좀 말자. 부족하다, 상대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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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스스로 좀 짠한 마음이 든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늘 가정의 평화를 많이 생각하며 살았다. 가족들이 인정 안 해줄 수도 있지만... 엄마가 이 얘길 들으면 한마디 할 것 같다. "너만 잘 하면 돼"라고.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