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짜 행복할 거야!

by 노니

지난주 종영한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마지막 회를 조금 늦게 봤다. 아이돌 출신 남자 주인공과 신인 배우 여자 주인공의 등장에 딱히 큰 관심이 가질 않아 놓치고 있다가, 우연히 보게 된 몇 장면 덕에 첫 회부터 정주행을 시작했다. 나문희 할머니의 하드 캐리. 제대로 된 인생 선배의 주옥같은 대사들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 진한 여운에 검색창에 드라마 제목을 넣어봤더니, 할멈(극 중 나문희 역할)의 대사가 주르륵이다. 역시 나만 인상 깊었던 건 아니었구나.

남자 주인공이었던 2PM의 준호가 자신의 SNS에 적은 종영 소감 기사가 있길래 클릭했다.

'(...) 어딘가 살고 있을 강두와 문수에게 있는 힘껏 행복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할멈이 강두에게 했던 마지막 당부, '있는 힘껏 행복해라'를 인용한 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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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마주하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집에 들어가는 버스 안, 갑자기 동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시간 되면 같이 저녁을 먹잖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따끈따끈한 신혼집 초대였다. 퇴근해 들어오고 있는 친구와 도착 시간이 대강 비슷할 것 같아 친구 집 앞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혹시 친구를 기다리게 할까 도착 시간을 넉넉히 불렀더니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잠깐 시간이 떠 버렸다. 갑자기 잡은 약속이라 집들이 선물을 준비 못한 게 마음에 걸려 혹시 근처에 선물할 만한 게 있나 둘러보는데 길 건너편에 멋없이 크게 ‘꽃’이라고 쓰여있는 상점이 보인다. 세련미 없는 그냥 동네 꽃집. 그래도 이게 어디야, 얼른 길을 건넜다.


“어서 오세요오-.” 높은 솔의 맑은 소프라노 소리. '꽃집 사장님' 하면 딱 어울릴 법한 고운 목소리다. 나이는 꽤 있어 보이셨지만 꽃을 만지는 분이라 그럴까, 웃는 얼굴도 참 고왔다. 인사를 하고 쇼케이스를 봤더니 예상대로 꽃 종류가 많지 않았다. 국화, 장미, 그리고 용담초, 딱 세 종류. 딱히 고민할 여지도 없어 장미를 골랐다. 다행히 촌스럽지 않은 예쁜 핑크색에, 송이가 크고 줄기도 굵은 게 상태가 좋아 보였다. 사장님께서 쇼케이스 문을 열어주시며 꽃송이를 고르게 해 주셔서 고개를 안으로 쑤욱- 집어넣었더니 그걸 보시고 사장님이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어머, 그렇게 있으니까 자기가 꽃 같네.” 간지럽지만 싫지 않은 기분에, 나도 기분 좋게 대꾸했다. “꽃집을 하셔서 그런가, 말씀도 진짜 꽃 같이 곱게 하시네요.”



포장을 시작하시며 선물할 꽃인지 물으시기에 신혼집에 간다고 말씀드렸더니 대화가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로 넘어갔다. 아직 미혼이라는 내 대답에 사장님께서는 갑자기 고백을 시작하셨다. 자신도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안 할 수 있으면 굳이 하지 말라고, 본인은 안 해도 될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단다.


“내가 고생 고생하다가 겨우 이혼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막 화냈어. 진작 이혼하라고 말 좀 해주지 그 고생을 할 때까지 뭐 했냐니까, 사람들이 내가 말을 듣겠냐데? 내가 너무 사랑했데. 맞아, 내가 아저씨를 너무 사랑했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깊은 이야기를 하면서 혼자 깔깔 웃으신다. 아저씨가 바람피우고, 노름하고, 술 마시고. 그냥 안 봐도 알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여전히 고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예쁜 것만 보고 예쁜 말만 하며 꽃같이 사셨다는 얘길 들려주셨으면 좋았을까, 그냥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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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자기가 포장한 꽃다발을 보고 감탄을 하신다. 꽃다발을 받고 뒤돌아서 나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 인사했다. “사장님 행복하세요” 그러자 사장님은 까르르 소녀처럼 웃으시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셨다. “응. 나 진짜, 행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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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힘껏 행복해라.'


너무 뻔한 대사지만 건네는 이의 마음이 얼마나 잘 전달되던 말이던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각자의 시간을 지나 이제 막 함께 행복해지기 시작한, 어떤 일을 겪었건 우리 이제 좀 행복해져도 된다고 서로 마주한 미소를 보며, 티브이 속 얘기에 지나치게 마음을 쏟았던 나는 여러 번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SNS에서 다시 한번 그 대사를 마주하는데, 참 예뻤던 꽃집 사장님이 생각났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러게 여기에도 있었다. 있는 힘껏 행복을 다짐하는 사람이. 보고 있는 사람도 함께 행복해지고 싶게끔 미소 짓는, 드라마 속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았던 그녀를 나는 이미 만난 적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