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었네?"
퇴근하고 들어오신 아빠가 묻는다. 그동안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던 딸이 백수가 돼서,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게 몇 개월째인데도 아직 낯선 가보다. 칼퇴를 하면 마치 그날은 대단히 운수 좋은 날 같았던, 근데 사실 칼퇴를 하고 집에 바로 와도 저녁밥 때를 지나던, 근무 시간이 지나치게 긴 회사를 오래 다녔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었어?"
2차로 묻는다. 바쁘다는 말을 날숨처럼 내뱉던 때도 짬만 생기면 무조건 밖으로 나돌던 애가, 어째 퇴근하고 올 때마다 집에 있으니 좋으면서 걱정도 되는가 보다. 갑자기 생겨버린 길고 긴 자유 시간을 뭘 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분명 궁금할 텐데 행여 부담될까 저리 돌려 묻는다.
내가 대강 차려낸 저녁을 먹고 아빠가 어딜 좀 다녀오신다며 나가셨다. 추운데 어딜 가시나,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빠가 금방 들어오셔서 식탁 위에 뭘 올려놓는다. 따뜻한 카페라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 '동네 카페 중엔 그래도 OO이 젤 나은 것 같아.' 며칠 전에 내가 지나가듯 말했던, 집에서 빠른 걸음으로 5분은 걸어가야 하는 카페의 커피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바로 집 앞에 카페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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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밥을 먹고 나면 항상 커피를 드셨다. 엄마는 상을 치우고 찬장에서 커피잔을 내려 커피를 끓였다. 찬장에 있던 아빠의 커피잔은 밥 먹을 때 사용하는 물컵과 다르게 화려한 꽃무늬에 따로 받침까지 있었다. 뜨거운 커피가 담긴 예쁜 잔을 받침에 올려 조심조심 들고 갈 때, 잔이 받침에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듣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빠가 마시고 난 커피잔 바닥에는 늘 커피가 조금 고여 있었는데, 잔을 입에 대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면 몇 방울 쓴맛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아빠는 가끔 엄마 몰래, 일부러 나를 위해 한 모금 정도 커피를 남겨두셨다. 날름 마셔버리고 쓴맛에 오만상을 지으면 아빠는 재밌어하고, 엄마는 질색을 했다.
내가 물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자 엄마는 커피 타는 법을 알려주셨다. 물이 다 끓으면 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안에 담긴 물을 한 바퀴 천천히 돌린 다음 따라 버린다. 티스푼으로 커피 둘, 프림 둘을 소복이 떠 넣은 다음 다시 물을 부어 바닥을 살살 젓는다. 먼저 잔을 데우는 건 엄마의 정성이었다.
내가 더 이상 다방커피를 먹지 않게 되자 아빠에게도 원두와 핸드밀을 선물했다. 어디서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제일 먼저 아빠가 생각났다. 한껏 젖힌 목으로 넘어가던 몇 방울 쓴맛이 생각났다. 정성껏 잔을 데우던 엄마가 생각났다. 무뚝뚝한 딸은 원두가 다 떨어지기 전에 새 원두를 채워 놓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고, 무뚝뚝한 아빠는 아침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딸이 마실 커피를 내려놓는 것으로 마음을 전한다. 내가 하던 것보다 더 큰 정성으로, 아빠는 출근 전 원두를 갈고 뜨거운 물을 부어 천천히 커피를 내리신다.
술이 센 건 집안 내력이라고 하던데 카페인이 센 것도 아마 집안 내력인가 보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나의 아침이 아빠가 남겨 주던 한 모금의 커피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