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목에 진주

by 노니

설 연휴 가족들과 대림미술관에 다녀왔다. 마침 도슨트 해설 시간에 맞게 도착한 덕에 작품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도슨트가 독특한 종이 작품 앞에 멈춰섰다. "이 작품의 제목은 <Creative Factory_Machine>으로 프랑스 디자이너 짐앤주의 작품입니다." 알록달록 장난감같이 생긴 작품은 원하는 것을 입력한 뒤 입구에 종이를 넣으면, 종이가 기계 안을 이동하면서 입력한대로 만들어 지는 기계라고 했다. 물론 가상의 기계다. 도슨트가 밝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이라면 뭘 입력하시겠어요?” 몇 초간의 침묵, 한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돈”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지고 도슨트는 능숙하게 받아넘긴다. “그쵸. 뭐니 뭐니 해도 돈이죠. 다음 작품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손을 잡고 있던 조카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니, 조카는 영문도 모르고 같이 웃어준다.

뭐니 뭐니 해도 돈, 뭐 저런 말을 하냐.
마음속으로 그들을 속물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냐고 하면, 나는 항상 돈보다는 시간이었다. 돈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나, 내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했다. 하던 일이 단순히 돈벌이로 전락해버린 순간부터, 돈 버느라 내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돈이 시간을 빼앗아 가기라도 한 마냥. 아니 돈이 무슨 죄람. 머릿속 인지구조가 자주 오류를 일으키던 시기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둔다고 할 때, 혹 주변 사람들이 돈 얘기를 하면, '나랑 가치가 다른 사람들이군', 속으로 선을 긋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 대신 넘치는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나에겐 별로 여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주체가 안되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생각하면 까마득해지는 날도 있었다. "아오, 시간만 있으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는데, 이상하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늘 짧은 여행에 아쉬웠으니 여유 있게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하다가, '에이 돈도 없는데'라는 마음이 올라오면 금세 우울해졌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하던 시간이 생겼는데 뭔가 행복하지 않다.

왜...
돈을 벌 때는 쪼들리는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멋대로 돈을 썼다. 지금은 시간을 그렇게 쓰고 있다. 규모 없던 소비 습관이 고스란히 시간으로 옮겨 왔다. 돈 탓을 하느라 시간의 가치를 한껏 격상시켰다가 막상 손에 쥐여주니 시시해한다.
지금 당장 갖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데 사고 나면 포장도 뜯어보지 않고 구석에 쌓아두는, 가끔 티브이 속에 나오는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저것만 있으면 내가 행복할 수 있는데 저게 없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불행해.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보며 불평하느라, 지금 내 손에 쥔 것은 볼 겨를이 없다. 그들은 쥐고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른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나를 철렁하게 하는 기분의 정체는 통장 잔고에 찍힌 빈약한 숫자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내 태도였다는 걸.

연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간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집에 준서 세뱃돈 봉투 없어?” 세뱃돈을 한데 모아 둔 봉투가 없어졌단다. 조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터라 외가, 친가, 증조 외할아버지댁까지, 가는 곳마다 친척들이 전부 세뱃돈을 쥐어 주셨다. 모르긴 몰라도 봉투 안에 꽤 많은 돈이 들어있었을거다.
다음 날, 오전부터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없어?”, “응.”, “이상하다, 그게 어디 갔지?”
세뱃돈을 잃어버리고, 속상해하고 있을 조카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휴, 준서는 괜찮아?”
물어보기 무섭게 바로 돌아오는 언니의 대답,
“어, 완전. 야, 우리나 속 쓰리지.” 조카는 괜찮단다. 바꿔 받은 전화 속 조카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이 해맑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야 하니 어서 끊으란다.

아이가 돈의 가치를 모르는 건, 이렇게 귀엽기라도 하지.
다 큰 이모는 전화를 끊고 쓴웃음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