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을 함께 했던 연인은, 농구를 아주 좋아했다. 자기 전에 전화를 해보면, 새벽까지 농구를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분명 공대생이었는데 체대생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학과 활동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무엇보다도 열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농구 동아리 선배가 해준 소개팅으로 만났었다. 입만 열면 농구, 농구였다. 여름엔 져지를 입고, 겨울엔 져지 안에 티를 겹쳐 입었다. 농구라면 강백호, 서태웅, 슬램덩크가 전부였던 내가, 동부 김주성 팬이었던 남자친구를 따라 원주까지 응원을 다녔다.
사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보물 1호라며 낡은 공책을 하나 보여줬다. 표지에는 [OO 중학교 퍼펙트 가이드북]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기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농구를 좀 한다는 아이들의 전략을 분석해 놓은, 본인이 손수 만든 전략집이었다. 연필로 꾹꾹 눌러 채운 그림과 글자들이 공책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손수 그린 선수 얼굴 아래로는 선수의 프로필, 선수로서의 장점과 단점, 앞으로의 개선 방향, 플레이 스타일, 주로 농구하는 무리까지 한 명 한 명 깨알같이 분석되어 있었다. 다른 학교와 붙게 되어 자기들끼리 팀을 이뤄나갔을 때 어떤 조합이 좋을 것인지, 뭐 각종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물론 자기 자신이 학교의 중심, 동네의 중심, 세상의 중심이었고, 모든 포지션에 능했으며 해결하지 못할 상황이 없는 것으로 분석되어 있었다.)
내용을 이처럼 자세히 아는 이유는, 집에 가져가서 꼼꼼히 읽어보라며 그날 내게 [퍼펙트 가이드북]을 빌려줬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나 지난 뒤, 우리는 긴 연애를 끝내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이별하고 일주일 뒤, 그는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아니, 준비하던 어학연수를 일주일 앞두고 헤어지게 된 상황이었다. 사이좋게, 오래 만났기 때문에 이별도 잘 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자 말할 만큼 깔끔하게 돌아섰다. 물론 그런 이별은 없었지만.
헤어지고 며칠 뒤, 그 애에게 전화가 왔다. 안부를 묻고 서로 약간 울먹거렸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촉촉한 목소리로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퍼펙트 가이드북]을 돌려달라고. 서로 완벽하게 잊고 있었던, 내내 내 방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었던 그 애의 보물 1호. 자기는 곧 출국이라 직접 받지는 못 할것 같고, 그렇다고 언제 한국에 다시 들어올지 모르니 태희(남친의 베스트 프렌드)에게 전해 줄 수 있냐고 했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한 달 뒤, 나와 구 남친의 베프는 잠실 어디쯤에서 만났다. 카페에 들어가서 앉자마자, 내가 가방에서 [퍼펙트 가이드북]을 꺼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뭐람. 웃음을 멈추고 태희도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아..!”
가장 작은 사이즈의 십자드라이버였다.
언젠가 남자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안경 다리 쪽의 나사가 곧 빠질 것 같이 느슨해져 있었다. 공구함을 뒤져 드라이버 세트 중 가장 작은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였다. 또 언제 느슨해질지 모르니 그냥 가지라고, 줬었던 것 같다.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우리 집 드라이버 세트에 마지막 한 칸이 비어 있을 것 같다며, 꼭 돌려주라고 굳이 만나서 주고 갔단다. 나참. 지가 왜 우리집 드라이버 세트를 챙기고 그래, 이게 뭐라고.
그렇게 구 남친의 베프와 나는 테이블 위에 가장 작은 사이즈의 십자드라이버와 [OO 중학교 퍼펙트 가이드북]을 올려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더니 남자친구의 보물 1호를 돌려주고 나서야 뼈져리게 느껴졌다. 기억도 못했던 드라이버를 돌려받고야 서글프게 깨달았다. 이제 이별이구나, 진짜 이별.
이런 이별의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 아니고, 대학교도 졸업하고 난 뒤에 있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