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아주 심기의 계절

by 노니



백수로서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신촌 메가박스에 아침 8시 30분 조조 영화 예매라니. 그 시간까지 신촌에 있는 영화관에 도착하려면 집에서 한 시간 전에는 나가야 했다.

2월의 마지막 날을 한 시간 앞둔 어젯밤, 2월 말일까지만 쓸 수 있는 영화표를 선물 받았다. 나 참, 하필이면 28일에는 선약이 두 개나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짜 맞춰 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이른 점심 약속 전, 아침 시간뿐. 눕기 전 알람을 맞추면서 생각했다. ‘못 일어나면 할 수 없고’

뭐 대단한 거 한다고, 부산을 떨며 준비하고 8시 35분에야 겨우 상영관에 안에 들어갔다. ‘리틀 포레스트’ 오늘이 개봉일이었다. 이미 일본 원작을 본 터라,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소박하게 아름다운 우리나라 농촌의 사계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임용고시를 4번이나 본 수험생이라서, 언제나 서울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서울 촌년이라서, 무엇보다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부유하는 겁쟁이라서, 거부할 수 없이 주인공에게 몰입했다.

시험 실패로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고향에 돌아온 혜원은 고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매번,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한다. ‘오래 안 있을 거야. 곧 다시 서울 갈 거야’
고향에 돌아와보니, 혜원의 어릴 적 친구들이 있다.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고향을 늘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은숙, 서울 생활을 모두 내려놓고 귀향을 선택한 재하. 혜원은 그들과 함께, 곧 고향 생활에 적응한 듯 보인다. 뭐 저렇게까지 싶을 만큼 시골 생활에 열심을 내지만 도망친 서울을 떠올리기 싫어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앞만 보며 달리는 것뿐이다. 정작 마음속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다. 미뤄뒀던 마음들을 재하에게 들켜버리고 난 뒤 혜원은 기약도 없이 다시 서울로 떠난다. 예전에 고향을 떠날 때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도 그저 서울을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견딜 수 없는 문제들은 꾹꾹 눌러 담은 채 도망친 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열심히 또 열심히 살 뿐이었다.
혜원이 서울로 돌아간 뒤, 걱정하는 은숙에게, 재하는 확신을 갖고 말한다. 꼭 돌아올 거라고. 혜원은 ‘아주심기’를 하려는 거라고.
농사를 지을 때 처음 작물의 씨를 뿌려 싹이 나면, 그 싹을 걷어 준비해놓은 거름 섞인 땅으로 완전히 옮겨 심는다. 더 잘 자랄 수 있는 땅으로. 그리고는 수확할 때까지 더 이상 옮기지 않는데 이것을 ‘아주심기’라고 한단다.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서울을 떠나 인도를 돌아다니다가, 제주에 정착한 어떤 이의 이야기였다.

인도에서 굉장히 행복했지만 어쨌건 그곳에 정착한 건 아니었죠. 그런데 제주는 생활과 여행의 중간지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자유롭지만은 않지만 속박되어 있거나 어딘가 생활 한구석에 콕 박혀있지도 않으니까요. 인생에서 이렇게 안정적인 시기를 처음 맞이해 봐요. 그전에는 항상 떠나고 싶고 다른 곳에 더 좋은 게 있을 것 같고,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옳은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요. 항상 마음속으로 ‘나는 정착하지 못할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제주에 와서는 다 좋아요.

이상한 습관같이,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 맞는지를 확인해왔다. 눈이 항상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분명 어딘가 다른 곳에 더 좋은 게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오늘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하다가도, 내일 당장 모든것을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쿨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디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마음이라는 걸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나는 어딘가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오래오래 괴로워했다. ‘여기서 떠나서 뭘 하고 싶은건데?' 묻는 사람에게는 ‘그건 몰라, 일단 여기를 떠나는 게 중요해' 대꾸했다. 꼭 내 맘 같은 인터뷰를 읽으니, 가슴이 아프다가 그만 철렁하다가 조금 안심이 됐었다. 그냥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했는데, 아닌가보다. 나도 정착할 수 있는건가보다. 슬슬 아주 심기를 해야겠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아이유의 공기반 소리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수많은 글자들을 대강 흘러보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문구에, 흐르던 눈길이 멈춘다.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 수 있게 도움 주신 모든 분들과 모든 동식물들에게 감사합니다‘
끝까지, 앉아 있길 잘했다.

작물이 각각 자기의 속도를 가지고 자라듯, 누구나 자기의 때가 있는 법이다. 아주 심기를 하기 전에 튼튼한 싹부터 틔워야지. 아니 그전에 ‘나’라는 씨앗이 심기우기까지 도움 주신 모든 분들과 모든 자연에, 모든 말들과 글들에, 감사해야지. 그러게, 어디 이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모두의 영양분덕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지금의 씨앗이 되었다. 부유하던 마음들을 꼭꼭 아주 심기 해보려고 한다. 바야흐로, 아주 심기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