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흰 눈 속에서 가장 빛이 났다

by 노니


그는 춘천에 살았다. 외지 사람들의 그 도시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은 공지천의 자욱한 새벽안개를 닮았다. 춘천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종잡기 힘들었다. 그에게 소양호 경치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가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도시는 흰 눈 속에서 가장 빛이 났다.
_32p, 《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이 구절 때문이었다, 오늘의 춘천행은. 이 글을 읽으면서 '눈이 오는 날, 춘천에 가야겠다' 내내 벼르고 있었다.


한낮의 경춘선은 텅 비어 있었다. 느리게 달리는 전철 밖으로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하늘이 보였다. 서울서부터 내내 그 상태였지만, 종착역인 춘천에 도착할 때까지 눈은 내리지 않았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역 밖으로 나와, 소양호에 가는 150번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넜다.

'아!'
거짓말처럼 가물가물 먼지 같은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춘천역에 내리자마자 눈이라니. 오후 눈 예보를 보고 부랴부랴 경춘선에 오른 터였다.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쓰여있는 글자를 따라 읽었다. ‘낭만 도시, 춘천’

버스를 타고 소양호까지 가는 동안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구불구불 소양호로 오르는 길이, 흩날리는 눈에 덮여 온통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눈앞이 모두 눈이다. 눈, 눈, 눈. 멀리 보이는 풍경은 마치 연회색 도화지에 물 묻힌 붓으로 대강 선만 그어놓은 듯, 그저 경계만 보였다. 저기 호수가 있고, 저기 산이 있고. 저기에 뭐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거리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온통 희끄무레, 뿌연 허공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눈송이가 얼굴에 와서 부딪혔다. 눈이 쉬지 않고 내리는 덕에, 녹을까 안타까울 겨를 없이 계속 폭신하게 쌓여만 갔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쌓인 눈은 질퍽해지지 않고 설탕처럼 가루 가루 흩날렸다.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 동안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풍경에 취해 있는 듯했다. 소리내어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책로 끝까지 걸어가 오봉산으로 건너가는 배가 닿는 곳으로 내려갔다. 이런 날씨에도 배가 뜨는지 궁금했는데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가까이서 본 호수는 하늘과 꼭 같은 색이라,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호수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거리감도 현실감도 없이, 그냥 모든 풍경이 하나로 엉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멀리 메마른 겨울 산에서부터 눈앞의 앙상한 겨울나무까지, 세상이 완전히 하얀색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봤다.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변화라니. 그저 눈 하나 더해진 것뿐인데, 황량했을지 모를 겨울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 흐뭇할 지경. 눈이 오면 그리워할 곳이 생겼다.

누군가 ‘설렘’의 마음을 ‘뼈와 뼈 사이에 내리는 첫눈’ 같은 거라고 했는데, 오늘 내 뼈와 뼈 사이에는 줄곧 꽃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