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가족 카톡 창에 조카가 그린 그림을 찍어 올렸다.
“문이랑 창문을 엄청 쪼그맣게 그렸는데 뭐 문제 있는 거 아니겠지?”
그러게, 나도 어디서 봤던 것 같다. 그림으로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는데, 문이나 창문을 작게 그리면... 어쩌고...
아빠가 바로 대답한다.
“교회 그림이네. 원래 교회 안에서는 십자가가 크게 보이고 창문은 잘 안 보이는 거다. 준서가 느낀 대로 잘 그렸네.” 우리는 모두 같은 그림을 봤지만, 모두가 같은 것을 본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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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도착하고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관광객을 보면서 생각했다. 파리, 이 도시의 일상은 얼마나 많은 일탈들과 함께 공존하고 있을까. 흥분에 휩싸인 관광객들을 매일 보고 상대하는 일상이라니, 중국인으로 꽉 찬 명동을 생각하니 그만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졌다.
루브르 박물관의 입장이 시작되기 전, 일찌감치 도착해 미리 줄을 섰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리 피라미드를 닦는 두 명의 흑인 직원. 이른 시간, 관광객들이 들이닥치기 전 피라미드를 열심히 솔로 문지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곧 깨끗하게 씻긴 피라미드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리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브이를 그리고, 점프를 하고, 각종 포즈로 신나게 사진을 찍어댄다. 엄청난 인파에 밀려 전시관 안으로 입장을 했다.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홀린 듯 따라갔다. 모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모나리자 앞. ‘아, 모나리자’ 감탄할 겨를도 없이, 더 가까운 곳에 가서 모나리자를 보려고, 아니 찍으려고 서로 밀고 밀린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모나리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두 사람. 모나리자를 관리하는 박물관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모나리자를 등지고 서서,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우리를 감상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매서운 눈초리로. 다른 작품들을 보려고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길을 잃었다. 계속 작품을 보고 있지만 내가 어딜 향해 걷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전시실의 직원들은 조금은 무료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방안에는 여지없이, 우리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명작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어떤 아침에는, 출근 시간 즈음에 버스를 타게 되었다. 내가 탄 72번 버스가 센 강변을 따라 에펠탑을 지나갔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내 셔터음이 무색하게, 버스 안의 사람들은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눈 앞에 에펠탑이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나 당연하다. 누군가는 평생에 한번 일 모나리자가 누군가에게는 매일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고,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한번 일 센 강변이 누군가에게는 매일의 출근길일 테니까.
내 일상을 떠올려 봤다. 거의 매일 같이 광화문이나 동대문을 지날 때 내 표정이 어땠더라. 익숙한 것에 감격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지. 여행에서 몇 번이나 떠올렸다. 누군가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감격의 일탈이 될 수 있다고. 사실은 내 일상 안에도 에펠탑이, 센 강이, 모나리자가 박혀 있는 거라고. 같은 것을 보지만, 사실 같은 것을 보는 사람은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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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영어도 불어도 서툴고, 공항 수속은 늘 긴장되고. 후딱 끝내 놓고 맘 놓고 쉬어야지,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서둘러서 일등으로 들어가 놓고서도 마지막 검색대 앞에서 내가 허둥댔나 보다. 키가 큰 흑인 직원이 나를 한 번 지그시 쳐다보더니 말한다.
"마담, 당신 늦지 않았어요."
머쓱하니 웃고, ‘맞아 나 늦지 않았지’ 곱씹는데 그 말의 울림이 너무나 좋은 거다. 여행 마지막 날의 붕 떠있던 마음이 조용한 울림으로 차분해졌다. 맞아, 나는 늦지 않았다. 서른 중반. 스스로에게 꽤 충실하게 살았지만. 아직 미혼, 비어있는 잔고, 여전히 고민하는 진로. 비교하지 않는다고, 서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의 기준들에 따라가려고 버둥댄 적이 왜 없겠는가. 그런 내게 징-하니 울림을 준다. ‘맞아, 나는 늦지 않았어’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늦은 사람은 없다. 서울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아빠와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다가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엄마의 눈도 그렁해진다. 엄마, 아빠도 늦지 않았는걸.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진지도 모르겠다. 같은 것을 보지만, 아마도 다른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