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스트레스 지수가 감당 못할 만큼 높아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곧 있을 여름휴가가 마치 구원인 것처럼 매달렸었는지도 모른다. 몸도 마음도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는 언제나 즐거운 여행을 해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의심 없이 믿었다. 밤 10시 20분 비행기니 회사에서 넉넉히 6시쯤 퇴근을 할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무거운 라임이(캐리어)를 이고 지고 나왔고, 출근 뒤에 캐리어에서 기내에 들고 탈 파우치들을 따로 빼놓았다. 보기 드물게 계획적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도 뿌듯하게 잘 꾸린, 참으로 계획성 있는 짐가방이었다.
점심은 남아 있는 CS팀과 먹었다. 퇴근을 하면 모두 일주일 동안 휴가였으니, 점심의 주제는 당연히 휴가 계획이었다. 여유가 넘치는 휴가 전야였다. 그리고 사건(?)은 오후에 터졌다. 다른 팀은 다르게 대체할 이가 없는 md직원의 폭탄 퇴사 선언. 그녀의 휴가 마지막 날이자, 우리의 휴가 전 날. 다음 주 월요일에 그녀는 복귀해서 업무를 해야만 했다. 지금 당장 그 업무를 인수인계를 할 사람이 없고 나도 남을 수 없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스트레스 지수가 또 끝없이 올라서 뒷목이 뻣뻣해졌다. 최근 긴장되거나,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그 긴장을 잘 해소하지 못했다. 말이 길어졌지만 그냥 울고 싶었다. 업무를 잘게 쪼갠 다음, 아주 자세히 적었다. 다음 주 출근할 팀들에 가능한 대로 일단 분배, 각종 당부를 메모로 남기고 퇴근 시간 직전까지 허둥대다 나왔다. 괜찮겠지, 신경 쓰지 말라는 사장님의 말에도 긴장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거 좀 비정상이다. 남은 직원이 몇 명이나 되는데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해소되지 않는 게 정상은 아니다.
떠나 있는 동안, 때때로 집중력을 잃고 헤맸다. 숨 막히게 좋았지만 갑자기 서글퍼지곤 했다. 온전히 혼자였지만, 스스로를 얽맸다. 아무 일 없는데도 긴장했고, 감정이 둔해져 감각도 둔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떠나와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상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가 보는 낯선 여행지보다 더 낯선 내 모습, 그 모든 걸 인정하면서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은 행복하고 버거웠다.
가까운 서울역으로 가서 도심공항철도를 타기로 했다. 금요일 퇴근 시간이라 차가 겁나 밀려서 버스를 탔다. 을지로쯤 갔을까? 립밤을 바를까 해서 에코백에 손을 넣었는데 뭔가 싸-하다. 에코백을 열었는데 화장품이 든 파우치도 충전기, 연결잭 등이 든 파우치도 없었다. 아침에 캐리어에서 꺼내 놓은 걸 정신 못 차리고, 허둥대다가 그만두고 나온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 택시를 잡았다. 잡히질 않는다. 한참만에 겨우 잡아 탄 택시는 말 그대로 기어간다. 아우, 버스 탈걸. 결국 회사에 다시 도착한 시간 7시 10분.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야지, 3시간 전 출발이면 괜찮아 괜찮아. 다시 겁나 밀리는 버스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서 수속하고 편히 가야지 했는데 도착해보니, 서울역에서 수속 가능한 시간은 7시까지. 멘붕. 다행히 급행열차가 바로 있었다. 열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니 9시 15분. 저녁도 먹고 여유 있게 출발하려던 계획은 무참히, 정신없이 터키항공 카운터로 갔다. 줄이 어마어마하다. 이제 막 맨 끝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앞에서 승무원이 내가 탈 비행기를 부른다. 수속 마감하니 이 비행기 타시는 분은 나와서 수속을 하란다. 부랴 부랴 나갔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 셔틀트레인을 타고 이동했다. 도착해서 게이트 앞에 서니 몸에 힘이 쫙 풀린다. 이게 뭐람. 직원의 퇴사 문자 이후, 물도 한 방울 제대로 못 마셨다. 그제야 배가 고프기 시작해 생각해보니, 점심으로 부실한 냉면을 먹었더랬다. 옆에 있는 음료 매장에 가서 주스 하나를 사서 세 모금만에 다 마시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무사히, 무사히 탑승.
무사히 탑승할 건 알았지만. 못 탈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타고나니 뭔가 서글픔에 더해져 너무 진한 피곤이 몰려왔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대강 세수를 하고 와서 영화를 둘러봤다. 영화관에서 예고편을 보고 보고 싶다 생각했던 영화가 있었다. <파리로 가는 길>, 원제는 <Paris can wait>
영화 속에서 여자 주인공이 작은 카메라로 찍는 사진의 구도가 매우 매력 있었다. 핸드폰 카메라만 들고 나서 여행길이지만, 좋은 풍경들을 얼른 사진에 담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영화의 거의 끝 장면을 보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1시간을. 밥 주면 일어나 먹고. 다시 자고, 뒤척거리다가 또 자고. 그리고 경유지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새벽 4시 반, 비행기가 한국 사람들을 꾸역꾸역 쏟아냈다. 앞으로의 경유 시간이 7시간 15분 인 것을 감안하여, 혹시 혼자 온 여행객이 있다면 말이라도 붙여볼까? 하고 두리번 거렸으나 눈에 띄질 않았다. 현재 시간 새벽 4시 30분. 모두가 10시간 넘게 구겨져 온 상태. 한바탕 시원하게 세수를 하고 본격적으로 비빌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스탄불 공항은 두 번째, 그때도 그렇게 느꼈었지만 꽤 으리으리하다. 새벽이라 아직 사람이 그리 많질 않다. 슬슬 끝까지 걸어가서 구경을 하고, 서점에 들어갔다. 알아보지 못하는 말들이 잔뜩 쓰여 있는 책들을 뒤적였다. 예전에 방콕에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들렀던 대형 마트 안에서 낯선 표지의 책을 봤다. 별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책이 바로 김난도 작가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였다. 영어도 아닌 태국어로 쓰여 있는 낯선 표지의 책을 발견했는데, 그게 너무 흥미로운 거다. 내가 아는 책을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기쁨에 그 뒤로 어딜 여행하건 서점은 자주 들른다. 또 그 나라만의 특유의 책 커버 디자인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 터키 서점의 예쁜 책 표지들을 즐겁게 구경했다.
서점에서 나와 깔끔하고 예쁜 식당가를 구경했다. 다행히 밤새 운영하는 곳들이 많아서 어디고 들어갈 수 있었다. 스타벅스를 지나쳐 가장 터키 분위기 나는 곳으로 가볼 테야 하면서 마음에 드는 카페에 가서 앉았다.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마시니, 살포시 이스탄불이 인사를 한다. 아쉽지만 오늘은 공항에서 함께 하자. 언젠가 꼭 여행 와야지.
카페를 나와 스트레칭을 하고 난리를 쳤는데도 겨우 8시. 아침을 먹으러 다시 맘에 드는 카페를 찾아 헤맸다. 아 타일 너무 예뻐. 여기서 이 정도의 타일을 보고 좋아했으니 포르투갈에서의 매 순간 눈이 안 돌아가고 배기나. 2층 제일 구석에 있는 카페, 구석에 있어 제일 여유롭고 조용하고 깨끗하다. 화장실도 바로 앞에 있고, 괜찮은 것 같다. 한참 앉아 있었다가 좀 졸다가 영화도 좀 보고, 그래도 몇 시간이 남는다. 8시간 경유의 압박.
아래로 내려오니, 1층에는 그새 사람이 득실득실하여져서, 어디 앉을자리도 없다. 아무 바닥에나 대강 앉아 책을 읽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 가져온 책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덜컹, 마음이 내려앉는 문장을 만나 몇 번이나 읽었다. 수첩을 꺼내 들고 옮겨 적었다.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이 느껴졌다.
일상을 떠나 별장 같은 곳으로 간 주인공은 그곳에서 자신을 본다. 여닫이가 나쁜 문짝. 덜컹거리는 문짝. 나는 다를까. 내가 만들어 놓은 내 일상인데, 나와 너무 맞지 않는다. 억지로 끼워 맞춰놓긴 했지만 바람 한번 스치면 지나치게 덜컹거린다. 안정감 없이 덜컹거린다. 지금 나의 덜컹거림이 이 여행을 만나 어떤 소리를 내며 어떤 모양으로 맞아갈지, 기대할 수 없지만 기대했다.
비행 2시간 전, 게이트를 확인하고 304번 게이트를 찾아갔다. 동양인은 나뿐. 포르토로 향하는 작은 비행기를 기다려서 다시 하늘을 날아 포르투갈에 왔다. 11시간도 왔는데 5시간은 껌이지, 생각했지만 맨 정신으로 보낸 5시간은 그것대로 또 고역이었다.
포르투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잃어버리지 않고 짐도 찾았다. 2년 전 캐리어 도착 지연으로 인해 터키 항공에 대해 마음속 깊이 조금 남아 있던 두려움과 미심쩍음이 사르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착륙도 겁나 스무스했고. 총 비행시간 17시간 내외. 경유 7시간 반 정도. 서울서 공항에 출발해 삽질한 시간, 내려서 수속하고 숙소로 가는 시간까지 더해보니. 하, 거진 30시간을 이동했다. 하하하, 웃음만 나온다. 워밍 업, 여행 준비 30시간 제대로 했으니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