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뭐가 좋냐면
2018. 01. 10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들이 이어질 거라고 경고했지만 집을 나섰다. 감기 때문에 집에 콕 박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숨이 좀 막혔다. 여행이 가고 싶었다. 첫 강릉 여행. 왜 때문에 강릉이냐고 물으신다면.
막연히 정말 맑은 찬내를 느끼고 싶었슙니다.
부지런 떠는걸로는 1등이었는데 이제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못한다. 눈 떠보니 8시 반이라 대강 준비하고 나와서 10시 10분 버스를 탔다. 무려 아메리카노까지 마시고 나서도 기사님 대각선 자리를 선점했다. 훌륭해.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홍천 휴게소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차고 맑은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 공기야. 찌릿할 만큼 찬 공기. 행복하다. 자작나무는 기가 막히게 겨울이랑 잘 어울리고. 하늘은 또 왜케 맑고 막 그러냐아.
우리나라 시골 겨울 풍경 좋다.
홍천 휴게소 풍경 좋네예. 숨이 탁 트였다.
# 강릉에 도착했다. 오죽헌으로 먼저 이동.
강릉은 뭐가 좋아? 응 하늘!
오죽헌 입장, 날씨가 너무 춥다 보니까 핸드폰이 툭하면 꺼졌다. 마음에 담아야지 해놓고, 사진으로 못 찍으니 안타까와 죽겠다. 문화해설사 어머니께서 바라보라고 한 곳에 서서 하늘과 소나무와 처마를 바라보았다. 기가 막힌다.
공기가 참 차가운데 좋다. 맑고 선명한 공기다. 마실 맛 나는 공기.
바람이 꽤 센 날이라 어딜 가든 스스스- 댓잎이 비비적대며 만들어 내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예전에 가르쳤던 한시 몇 구절이 생각날 듯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았다. 쳇. 손님인 줄 알고 나가보니 댓님에 바람이 지나고 있었다는 뭐 뭐 그런 내용의 시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한 밤중에 누워 스스슷 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면 절로 시상이 떠오를 것 같긴 하다. 멋지다 오죽.
풍경 좋고요.
마당에 있는 나무 중 한 그루에 몇 명이 달라붙어 뭔가 하고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물으니 나무속이 건강하지 않은 것 같아서 상태를 살피고 있다고. 나를 대하는 표정은 니깟게 뭘 알아, 라는 듯했으나 나무를 대하는 사람들의 손길이나 태도는 보물을 대하듯 애지중지해서 좋았다. (실제로 오죽헌은 보물입니다. 몇 호인 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어쩌면 이렇게 다양하게 예쁜 나무들이 심겨 있는지.
오죽헌에서 사임당이 가장 애낀 장소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사임당의 생애는 언제 들어도 기가 막히지만 누구라서 인생에 굴곡이 없을까.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고 쓴 율곡을 기르고, 아니 율곡을 포함한 일곱 남매를 낳고 키우고 품고 하는 동안 눈물 나게 행복한 일들도 셀 수 없이 많았을 거다. 지금보다 더 깨끗했던 그때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금보다 더 깨끗한 그때의 바람을 들이마시며 몇 번이나 아름답다 아릅답다 했던 날들도 셀 수 없이 많았을 거다. 바람에 날릴 듯한 구름. 시리다 하늘이.
시립미술관에서 특별전을 한다기에 스윽 들어갔다 나오고.
바짝 마른 겨울나무와 시리게 파란 겨울 하늘이 이렇게 조화로울 줄이야.
입구에 이이 선생님 동상, 견득사의. 멋지다.
나오는 길에도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샤샤샤.
숙소 도착, 어쩜 도미토리룸에 나 밖에 없다. 5인실을 나 혼자 쓸 예정. 꺄악.
겨울밤에 어울리는 간식, 귤이랑 쬬꼬. 도착하자마자 커피 내려주시고, 심지어 사다 놓은 순두부가 있다고 순두부를 끓이고 김치를 썰고 계란을 구워서 밥을 차려주셨다. 거기다가 간식까지 올려 보내 주셨다. 너무 좋아.
호스트의 취향이 확실한 게스트하우스 사랑합니다.
다락방 같은 느낌, 옛날 집에서 느껴지는 이 느낌 오랜만.
바닥이 절절 끓어서 바닥에 좀 앉아 있었다.
커튼 독특, 유럽에서 봤든 피노키오다.
가장 안 쪽 자리 내 침대로 찜.
2층 응접실도 다양한 패턴 천국
부엌에는 스웨터를 이어 만드셨다는 커튼. 최고로 독특하다.
거실
마당이 보이는 큰 창
거실 한쪽에 피아노가
아 귀여워라, 손을 들고 손톱으로. 건반을 꼭꼭. 스타카토.
좀 빈둥대다가 밖으로 나왔다. 제가 동네를 좀 걸어보겠습니다. 근데 해가 지내요, 해지는 하늘 어떡하지. 너무 좋으네.
여기는 포남1동
그냥 해 질 녘 동네 풍경 왜 이리 좋지 하늘 색도 오렌지 빛으로 물들고
동아일보 간판 겁나 빈티지해
오래된, 낮은 동네 아파트. 이런 곳에 살아본 적 없으면서 왜 이 풍경에 그리 추억이 물씬했는지.
멀리서부터 불이 기가 막히게 멋지게 들어온 건물이 있길래 접근했다.
가까이 가보니 강릉역
KTX가 뚫렸으니 뻥뻥
강릉역 주변은 올림픽 태세 돌입
강릉역 내부도 멋졌다. 화장실이 제일 멋졌다. 엄청 으리 으리.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가건물들 무지 넓은 주차장, 자주 보이는 대형 고속버스. 플래카드. 올림픽 분위기가 난다. 누구에게라도 축제 같은 올림픽이기를.
기가 막힌다 밤하늘도. 강릉에 뭐가 좋아? 응 하늘
극장에 영화 보러 왔다.
원더풀 라이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왔다.
영화관이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다.
기다리면서 책도 읽을 수 있다. 좋아하는 만화책이 있어서 뒤적뒤적, 마스터 키튼.
방명록도 있다. 아기자기하고만.
헷 원더풀 라이프 볼 거라고요
조용한 영화관
상영관은 하나입니다
영화관 맞은편에 맥도널드가 있길래 애플파이 두 개를 샀다.
피의 연대기 예고편.
영화관이 워낙 조용해서 애플파이는 영화 시작하고 조금 소란한 분위기에서 뜯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영화 끝까지 못 먹을 뻔. 시종일관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큰 소리 한 번이 안 나고 영화가 끝이 난다. 중간에 사알짝 몇 분 졸았는데 영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큰 문제없었다. 영화가 지루하다는 건 아니고. 잔잔하다. 잔잔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끝내 좋고야 말았다. 좋을 수밖에 없는 내용.
나의 행복한 기억들이 많은 것도 좋지만 내가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 속에 있다는 것도 참 좋다.
남주의 눈 빛은 정말 아련 아련 분위기 있고, 여주는 보면 볼수록 잘생겼다. 왜 하늘은 시절의 이지훈이 보인다.
다시 컴백홈.
밖이 춥다며 들어오자마자 따끈한 홍차를 내주셨다. 홍차를 마시면서 11시 넘게까지 호스트아주머니와 아주머니의 작은 딸과 셋이서 수다를 떨었다. 멋진 시간이었다. 처음 뵙지만 편안했다. 집이 주는 분위기처럼 아주머니는 매우 취향이 확실하고 멋있게 독특하셨다. 밤이 되니 더더 분위기 있어졌다. 호사를 누린다 아주. 몇 달쯤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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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은 처음인데, 좋다 무척. 와보니 생각보다도 더 겨울과 어울리는 곳이네.
마침 바람이 찬, 마침 멋진 계절에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