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이었다

강릉은 뭐가 좋냐면

by 노니

2018. 01.11


호스트 어머니께서 뜨끈뜨끈, 밤새 불을 넣어주셔서 늘어지게 잤다. 깨지도 않고 잘 잤다. 개운하게 씻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래층에서도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9시쯤, 조식 준비되었다고 내려오라는 말에 바로 내려갔다. 계단에서부터 커피 향이 아주 그만이다. 헙. 치아바타 샌드위치에 갓 나온 빵까지. 참 추운 이 아침에, 몇 분이나 차를 운전해 가서 공수해온 조식이었다. 게스트가 있으면 매번 아침에 빵집에 가서 샌드위치를 공수해오신다고. 작은 따님이 빵을 눈 앞에 보이는 아무 접시에 바로 담으려고 하자 어머님께서는 딸의 센스를 타박하시며 원하시는 접시를 정확히 말씀하신다. 어울릴만한 접시, 딱 거기에 담으라고. 호불호가 엄청 확실하신 호스트 어머님 덕분에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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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도 좋고, 접시도 예쁘고, 샌드위치는 하. 굉장히 맛있었다. 서울에 있어도 꽤 유명한 집이겠다 싶게끔, 사 오신 모든 빵을 맛있게 먹고, 커피는 바로바로 내려서 마시니 꿀맛이라 두 잔이나 마셨다. 계속 앉아 있으니 귤도 주시고 사과도 깎아 주시고 계속 다 받아먹었더니, 아침부터 진짜 배부르게 먹었다. 숙소의 아침 대화는 자연스럽게 오늘의 일정으로 이어졌다. 제대로 된 계획이 없는 내게 몇몇 장소를 추천해주셔서 그대로 가보기로 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첫 번째 장소까지 태워다 주신다고 하셔서 넙죽 감사합니다 해버렸다. 나가실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추운 날이라고. 아 감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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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목적지에 가기 전에 잠깐 들른 곳은, 바다를 보기 예쁜 추천 포토 스팟. 아직 바다를 가보지 않았다는 나를 위해 들러주셨다. 호스트가 아니었으면 절대 몰랐을 장소, 강릉에 와서 첫 바다였다. 시리게 찬 공기와 바다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상쾌한 기분, 호스트 덕분에 내 독사진도 몇 장 남기고, 바다에 감탄하며 몇 장쯤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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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풍경이 참 좋다. 바다를 향해 죽 놓여있는 의자. 그리고 원목 테이블은 기다란 나무 하나로 끊지 않고 통째로, 원래의 모양을 훼손하지 않은 채였다. 가지고 싶은 테이블, 같이 가져오고 싶은 바다 뷰였다. 부지런히 나와 다음 장소로 차를 태워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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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도에 와보고 12년 만에 와보는 참소리 박물관. 신기한 게 기억이 가물가물한데도 뭔가 좋았던 기분만은 분명히 남아 있어서 다시 들렀다. 12년 만에 와보니 옆에 영화 박물관이 하나 더 생겨 있었다. 해설사 안내 듣는 거 넘 좋았다.

에디슨이 사랑하는 딸의 생일에 딸을 위해 선물을 만들면 이 세상에 없던 소리 나는 인형이 발명되는 마법. 에디슨이 1년을 더 살면 그마만큼 세상에는 없던 발명품들이 생겨나는 마법. 84살까지 오래오래 살아주셔서 다행이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발명을 하셨단다. 살아 있는 것 자체로 인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어떤 무게감일까. 물론 인류를 위해 매일을 살고, 연구한 건 아니겠지만. 누군가의 시간이 다른 누군가의 시간보다 더 귀하다, 더 가치 있다 할 순 없지만 에디슨의 시간은 정말 값어치 있게 쓰였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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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이 만든 전구, 판매 포스터. 에디슨이 죽은 날, 미국 전역은 모든 전구를 1분 동안 끄는 것으로 세상에 빛을 만들어 준 에디슨을 추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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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감상실의 놀라운 서라운드로 공연 실황을 보고, 한 번 더 듣고 싶어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맞은편에 붙어 있는 참소리 박물관 관장님의 인터뷰 기사 스크랩을 꼼꼼하게 읽었다. 소유와 무소유, 집착이 그에게 엇갈렸다. 다만 크게 미치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죽으면 박물관 밑에 묻히겠다는 아버지를, 남편을, 자식이라고 부인이라고 막을 재간이 있을까. 정말 혀를 내두를 만한 이야기다. 아, 참소리 박물관은 축음기에 미친 한 개인이 만든 박물관이다. 축음기로 시작해 축음기를 만든 에디슨으로 확장된 관심은 그의 발명품 전구, 축음기, 영사기 전체를 아우르는 수집으로 이어졌다. 이쯤 되면 이건 종교라고 해야 할 정도. 입이 떡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실물을 고스란히 강릉호 앞에서 만날 수 있다. 뜬금없다고? 맞다, 정말 뜬금없다. 그러나 감탄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나저나 언제 적 기사기에, 지금은 입장료가 15,000원이다.

(3월 올림픽 기간의 박물관 입장료는 17,000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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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는 엄청난 박물관이 하나 더 생겼다. 같은 표로 여기도 입장 가능. 해설사 투어가 끝나면 영화 감상실에 들어간다. 영화관 서라운드가 좀 좋겠어, 기대하며. 여긴 처음이라 엄청 설렜다. 정 중앙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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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남자 주인공이 빗속에서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너무 유명한 장면이라 많이 본 장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더라. 온통 낯선 장면들이었다. 어찌나 좋던지. 눈물이 찔끔 났다. 빗속에서 탭댄스라니, 물웅덩이에서 찰박 찰박 이라니. 이렇게 기분 좋은 장면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유명했구나. 짧은 영상이 아쉬워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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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오는 길에 만난, 설립자 손성목 관장님. 어떻게 알아봤냐면 박물관 곳곳에 관장님의 사진이 걸려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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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박물관에서 나오면 눈앞에는 그림 같은 경포호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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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도의 한파는 아니었지만 오늘도 영하 10도 이하였는데, 맑고 쨍한 하늘과 잔잔한 경포호가 좋아서 꽤 멀리까지 빙- 호수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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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탈 작정이었는데, 걷다 보니 목적지까지 걸어왔다. 허난설헌 허균 생가. 아침에 호스트 작은 따님이 분명 생가 앞 소나무가 진짜 좋다고, 피크닉 하기 좋은 분위기라고 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역시 고향이 강릉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먼. 소나무 밑에서의 피크닉이라니. 크.
강릉 솔밭 피크닉의 위엄. 나에게 피크닉 장소 하면? 하고 상상했던 그림이랑은 많이 달랐지만 당연히 멋졌다. 간지 나는 소나무, 멋질 수밖에 없는 나무 아닌가. 롱다리 소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도 좋아해서 바닥도 열심히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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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는 참 소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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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으로는 순두부 전골을 먹었다. 진짜 국그릇 가득 퍼서 4번도 넘게 퍼먹었는데도 남을 만큼 많이 주셨다. 반찬도 다 깔끔하고 맛있고. 추운 날씨였는데 땀나게 먹고, 이게 7,000원이라니. 은혜로운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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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택시 타고 바다 근처 힙한 카페를 가볼까 하다가 그냥 바로 옆에 카페로 들어왔다. 너무 추워서. 분위기는 그냥 그냥. 몸을 좀 녹이고 있는데 호스트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추운데 어디서 뭐 하고 있냐고, 걱정되는데 데리러 갈까, 하신다. 너무 감사했다. 너무 감사한데 또 여기까지 데리러 와달라 하기도 참 죄송스러워서 사양했다. 근데 이때 들어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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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괜찮았는데 추운데 걸었던 게 피곤했던지, 난로 옆에서 노곤노곤 몸을 녹이니 금세 피로가 온몸을 덮쳐왔다. 들어갈까, 잠깐 고민하다가 오기를 부리며 참깨 책방에 갔다. 강릉에 아마도 유일한 것 같은 독립서점, 참깨 책방 깨북. 강릉에, 이 유명한 관광 도시에 책방이 여기밖에 없다는 게 신기했다. 조금도 걷기 싫은 마음에 카페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타고 책방 앞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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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안에서부터 약간 머리가 뜨겁고 코에서 뜨거운 바람이 슝슝 나오고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열심히 둘러보고 나왔더니 해가 완전히 져서 온도는 한층 차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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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색이 한가득, 너무 예쁜 놀이터에는 당연히 아이들이 없었다. 겨울의 놀이터는 참 쓸쓸하구나 싶어 사진을 한 장 찍는데, 배터리 방전. 아 정말 아이폰. 툭하면 방전이 되는 통에 이번 여행에 과장 조금 보태면 200번은 꺼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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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도착. 마당에서 바라본 숙소, 방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헤헤. 들어가자마자, 몸 괜찮냐고 하시며 유자차를 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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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화 끊고 나서, 밖이 점점 추워져서 몇 번이나 다시 전화하고 싶었다고. 엄마도 아니고 여행 중인 사람한테 계속 전화하는 것도 좀 그래서 못했다고. 호스트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감사해라. 또 한참을, 도란도란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가 여전히 머리가 좀 뜨거운 것 같아서 쉬겠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이 지글지글 또 따뜻하다. 오늘도 5인실을 1인실처럼 쓰는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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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만 켜고 깨북에서 사 온 매거진 영향력을 읽고. 따뜻한 홍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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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로 기어들어와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어바웃타임> 이전에 두 번이나 본 영화인데, 여행 전에 읽은 책에서 언급된 영화의 한 부분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서 다시 봤다. 혹시나 하면서 집 앞에서 산 맥주 한 캔은 어머니랑 수다 떠는 동안 온돌이 뜨뜻이 데펴져 있어서 미지근해져 있었다. 두 모금 마시고 버리고, 쫄병스낵을 먹으며 뒹굴뒹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가장 편한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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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가 선택한 오늘이 나의 오늘과 다르지 않다니. 멋진 여행을 즐기는 오늘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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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지글, 아늑한 다락방에서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