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 강릉

강릉은 뭐가 좋냐면

by 노니

아침부터 추욱 추욱 쳐지는 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추천받은 동화 가든에서 짬뽕 순두부를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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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서서 먹는 집이라는데 아침 7시 30분에 오픈하는 위엄. 대통령이 강원도에 와서 첫 끼에 여길 들렀다고 되어 있었는데 실화입니까. 실제로 도착한 건 애매한 시간(10시 30분)이었는데 사람들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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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을 휘휘 저으면 순두부가 듬뿍. 매콤하니 맛이 좋다. 순두부 전골이랑 분명 다르긴 하다. 짬뽕 국물 + 순두부가 특허까지 낼 맛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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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궂은 날씨. 눈 같은 비. 비 같은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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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그 툇마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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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강릉 여행에서 걷다 걷다 이 앞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이리 핫한 곳인 줄은 모르고 건너편 카페에 갔었네. 몇 달만에 다시 왔는데, 동네가 눈에 익다. 날씨가 흐린 데다가 평일 오전 시간이다 보니 손님이 많지 않았다. 주말에는 줄 서서 먹는 곳이라는데 금요일 오전은, 그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한가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낯익은 사람이 들어온다. 조금 전 동화 가든 옆자리에서 혼자 밥을 먹었던 여행자! 밥 다 먹고 커피 마시러 왔나 보다. 역시. 동화 가든 - 카페 툇마루. 이 코스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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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자리 너무 좋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스산하니. 낮은 담에 기와지붕은 같지만, 지방마다 약간씩 느낌이 다르다. 어디든 좋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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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를 후딱 비우고, 툇마루 시그니처 커피와 두부 케이크를 추가로 먹었다. 초당에 있는 카페 아니랄까 봐 두부 케이크라니. 센스가 그만이다. 케이크에 두부가 들어갔나. 콩으로 뭘 했나, 잠깐 상상해봤는데 실제로 보니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것이, 비쥬얼이 두부다. 기대 이상. 실은 치즈지만. 커피 맛있고, 케이크도 맛있다. 사실 특별할 건 없지만 뭔가 편안한 분위기가 나랑 잘 맞았다. 기회가 된다면 들러봄직한. 괜찮다, 분명 꽤. 주말엔 어떤 분위기 일지 상상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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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허난설헌, 허균 생가를 걷다가 걷다 걷다 밥 먹을 곳을 찾으려다 여기까지 걸어왔었다. 그때도 걸으면서 꽤 근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맛있는 밥 먹고, 분위기 마음에 드는 카페까지 만나고 난 뒤의 동네 산책은 훨씬 더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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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이 이렇게나 가까이 와 있다. 비가 온다고, 날이 궂다고, 바람이 분다고 봄이 오지 않을 리 없잖은가. 가지 끝에 봄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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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기간에 맞춰 오픈한다는 비엔날레를 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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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는 소나무가 일품이다. 풍경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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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국제비엔날레 2018 「악의 사전」
「악의 사전」은 역사적으로 자행된 비극적 경험을 투사하는 실제화된 주제로써, 더 이상 집필하면 안 될 공통의 '경험'과 '상황'을 사전의 한 페이지로 기호화한 명사이다. 23개국 58명(팀) 작가의 110여 작품들은 바로 그 '경험'과 '상황'에서 비롯된 내·외상을 관통한다.

브로슈어에 나와 있는 설명인데, 몇 번을 읽어도 첫 번째 문장을 막 아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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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개미. 자신들의 근거지를 잃고 난민으로 내몰려야 했던 원주민들을 개미로 비유했다고 한다. 어디나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개미로. 자세히 보면 개미의 몸통은 해골을 두 개 붙여 놓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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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선, 시리아 작가 압달라 알 오마리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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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는 얼굴들이 타고 있다. 여러 나라의 정상들, 우리는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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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G8’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실제 G8이 열렸던 현장에서 이를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시위에 사용했던 국기라고 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강대국 주도의 세계화와 국제 질서 재편을 경계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 현장 도슨트에게 분명 저렇게 설명을 들었는데, 검색하다 보니 직접 사용했던 국기는 분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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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커플의 몸에 새겨 놓은 키스마크 사진. 여자 둘의 얽혀있는 나체가, 큰 사이즈의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구도나 색감이 시선을 확 잡아 끌만큼 아름다워서 한참을 서서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작품과 관련된 기사는 따로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작가님의 이전 작품에 대한 인터뷰를 읽어보니 어떤 의미의 작품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대상들, 직시하고 싶지 않은 대상들을 공적 상황에서 드러내는 것이 제 작업인지라. 사실 작업을 관람하는 관객들이 제 작업을 부담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상태를 원해 본 적도 없고 그것을 맞추거나 고려해본 적도 없어요. 왜냐면 제 작업의 특이점이라는 게 그런데 있고, 그러한 거부 또는 터부가 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컨셉과 기능이기 때문이죠. "
출처 : 100인의 인터뷰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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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작가의 작품, 이스라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48명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사람들의 사진과 편지를 모아 놓은 것이다. 수감자들이 단식투쟁을 통해 가족 또는 다른 수감자들과 사진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면서 이렇게 의미 있는 사진과 편지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고. 도슨트의 설명을 들어보니 처음에는 단순히 흰 배경에서 찍던 사진이, 점차 가지고 있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카펫을 벽에 붙여 배경으로 쓰기도 하면서, 점점 더 화려한 사진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 올림픽에 이스라엘도 레바논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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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들을 모습을 카펫에 자수로 표현했다. 허술한 배를 타고 바다 위를 건너는 건 상상하는 만큼 끔찍한 일일 것이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작가는 바다에서 익사한 희생자의 집에 있는 카펫 위에 직접 그 고통의 장면을 표현했다. 태피스트리 작품.

여러 가지 색깔의 위사를 사용하여 손으로 짠 회화적인 무늬를 나타낸 미술적 가치가 높은 직물이다. 위사는 각각 작은북에 넣고, 그 색의 위사가 필요한 부분만 경사와 조직시킨다.
출처 : 네이버 지식 사전

작품은 훨씬 많았지만 인상 깊었던 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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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전시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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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건물이 굉장히 힙했다. 뒤로 보이는 소나무 숲과의 조화가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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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설명은 패스하도록 하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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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출입통제구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 <Don't follow the wind>의 하나인, 「후쿠시마에서 산책을」이라는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다소 조악해보이는 박스를 머리에 뒤집어 쓰면 헤드셋을 통해 360도로 후쿠시마 통제 구역을 촬영한 영상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신기했다. 말 그대로 방사능 오염 구역에 직접 들어가 이곳저곳을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인데, 안타까웠다. 실제 작가가 살던 비워진 집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원자력 발전소 근처를 가보기도 한다. 완전 무장을 한 채로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집에 들어 간다. 무성히 자란 풀을 해치고 찾아간 집은 너무 작고 예뻐 더 슬펐다. 원자력 발전소가 생겨나고 마치 원자력 발전이야말로 꼭 필요한, 안전한 에너지인 것처럼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공모했던 구호 '원자력 : 더 밝은 미래를 위한 에너지'가 쓰여 있던 간판은 사고 이후 서둘러 철거되었다고 한다.

일본 작가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제작한 다큐도 상영되고 있었다. 꽤 긴 영상을 앉아서 모두 보았다.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침착하게 대답하고, 위안소의 구조까지도 낱낱이(칸막이 높이까지) 설명해주던 할머니는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했느냐(하루에 몇 명을 상대했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입을 다문다. 그리고 힘들게 대답하셨다. 그런 얘기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의 미투에 한 변호사가 피해자의 천재성에 감탄한다는 트위터를 남겼다. 7년 전의 일을 장소와 시간 별로, 이제 막 나눴던 대화처럼 기억한다니 보통 사람으로서 놀라울 뿐이다, 이런 천재는 흔치 않다,라는 빈정거림이었다. 이 글은 '그렇다면 나도 천재'라는 내용으로 1400회 이상 리트윗 되었다고 한다. 7년이 아니라 70년이 지나도, 조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떠올리는 횟수가 조금 줄어들 수는 있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곱씹고 또 곱씹어 되려 선명해지는 기억이 있다. 잊으라고 말할 수 없는, 잊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기억들이 분명히 있다. 한 번도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본 적 없는 자의 완벽하게 오만한 지껄임이었다. 무지 또한 악이다, 때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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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 나오니 바깥은 한결 더 어두워져 있었다. 추적 거리던 비가 그쳤지만 아직 하늘은 무겁고 어두웠다. 행복한 기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좁고 안전한 나의 세상에서, 바깥을 흘낏거리며 내다보는 것 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시선이 바깥을 향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자책하지 말고, 계속 바라봐야지.

악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이 말이 마음속에 깊이깊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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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초당이라고 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 동네가 너무 좋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강릉 대부분이 그랬지만, 계속 걷고 싶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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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왔을 때 들어가 보려다가 못 들어갔더랬다. 이번에는 시간도 넉넉하니. <초당작은도서관>에 들렀다. 정말 정말 정말 작은 도서관이었다. 들어가면 입구에서 사서 선생님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주시는 도서관. 작은 도서관은 숨소리도 안 들릴 만큼 고요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듯, 문제지를 펼치고 공부 중인 청년과 유튜브로 영상을 검색해보고 계신 아주머니가 계셨다. 아주머니 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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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은 정말 질서 정연하게 정리 되어 있었다. 왠지, 모든 책이 골고루 사랑 받는 느낌으로, 단 한 권에도 빠짐없이 사서 선생님의 손길이 닿아 있는 모습이었다. 사랑 받는 책(?)은 예쁘다. 정말 작은도서관이지만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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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도서에서 관심 있는 책 두 권을 꺼내왔다. 업데이트 되면 바로 듣는 유일한 팟캐스트<책읽아웃>에 김보람 감독님이 나오셔서 알게된 책이 있었다. 얼른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인데. 어쩜.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님이 쓰신 신간《생리 공감》. 이렇게나 작은 도서관에서 기대했던 신간을 만나다니. 두 배로 반가웠다. 단숨에 줄줄 읽어내렸지만, 도서관이 6시까지 밖에 안 하는 터라 다 읽지는 못하고 나왔다. 이 책은 사야만 해. 나머지는 그때 읽어 봐야겠다. 다른 한 권은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나한테 물어보는 줄 알았다. 목차를 읽어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거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하는 목차였다. 하, 벌써 6개월째다. 일 년이 12개월인데, 백수가 된지 6개월에 접어들었다. 대박. 대박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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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6시에 문을 닫는 바람에 나와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지난번 여행에서 들렀던 9남매 집. 그냥 걷다가 들어간 작은 동네 밥집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찾았다. 그때보다 반찬 가짓수가 좀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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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윤기가 자르르 돈다. 대박. 입에서 녹는다. 먹고 있는데 사장님이 부르신다. 밥 한그릇 더 자시겠냐고, 지금 막 밥을 했는데, 밥이 너무 맛있게 됐다고. 아니 이 밥도 진짜 맛있는데, 그 밥은 얼마나 맛있기에. 나만의 맛집이다. 특히 쌀밥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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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두부 전골, 이게 7000원. 다시 봐도 푸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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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깜깜해진 골목, 밤이 되니 날이 좀 춥다. 강릉에 유일한 독립서점인 깨북에 들렀다. 굳이 굳이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인스타도 찾아보고, 별다른 소식이 없어서 열렸겠거니 하고 들렀는데, 막상 가보니 깜깜하게 문이 닫혀 있고 패럴림픽 기간 동안은 안목 해변에서 오픈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공지도 없이, 여기까지 찾아와야 확인이 가능하다니, 좀 상식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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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나와서 다른 서점을 찾았다. 지앤지오말글터, 강릉에서 제일 큰 서점이라고 했다. 강릉에서 제일 큰 서점을 구경했다. 서점원분들께서 정말 친절하셨다. 기분 좋게 책을 구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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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을 골랐다. 페미니스트 애송이인 나를 위해 아주 얇은, 입문서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너무나 고마운 효지씨께 마음을 담아 《힘 빼기의 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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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오는 길에 유니클로를 발견해서 들어갔다. 괜히 살 것도 없으면서 기웃대다가, 마침 발목이 시렵다며 양말을 골랐다. 추위를 많이 안 타는 편이라 잘 몰랐는데, 시린 발에 톡톡한 양말이 주는 온기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를 알게 되었다. 발이 따뜻하다는 건, 얼마나 손쉽고 빠르게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던가. 양말은 안 살 이유가 없다.

충동구매했다는 말을 좀 길게 했다. 후훗. 내일 부터는 날이 좀 풀린다고 했다.
해도 해도 너무 추운 날들이라, 온기가 좀 필요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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