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뭐가 좋냐면
실컷 자고 일어나 느릿하게 1층으로 내려가보면, 어젯밤 닫아 놓은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다. 며칠을 이어지던 비가 그친 이후로는 계속 햇빛 쨍쨍이다. 햇빛이 예쁜 것에 더해져 만들어 내는 예쁜 그림자. 저번에도 말했지만, 예쁜 건 그림자도 예쁜 법이다.
너무 좋은 이 풍경, 이제 더 이상 에어비앤비를 안 하시면 아쉬울 엄청 아쉬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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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바로 옆집이 교회였다. 11시인 줄 알고 시간에 맞춰 가서 부랴부랴 예배를 드렸는데, 사실은 11시 30분 예배였다. 덕분에 여유롭게 예배를 준비할 수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아리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예배 내내 너무 감사했다. 내가 꼭 들어야 할 말씀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이 정리되는 시간이었다. 종과 주인의 권위에 관한,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 잊지 말자. 내가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주신 분을 기억하고 내가 권위에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다면 그 권위가 어디로 부터 왔고, 나는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잊지 말자. 혼란했던 마음이 조금 맑게 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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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끝나고, 그 뒤로는 특별한 계획이 없던 나에게 효지씨가 멋진 제안을 했다. 차로 한참을 달려 뷰가 끝내준다는 카페에 나를 내려줬다. 있고 싶을 때까지 있다가 말하면 데리러 온다고, 날개만 없지 이거 천사 아닙니까?
그런데 카페 분위기가 쫌. 간판 어떡하지, 이 분위기 어떡하지. 일층은 횟집들이 모여있는 회 센터, 2층은 카페. 1층 계단에서부터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당황했지만 효지씨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바라본 바다의 풍경.
브라보. 어쩜. 주문진 바다 색깔 어떡하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어떡하지. 숨통이 트일 것 같은 바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제대로다. 깜짝 놀랄만한 뷰.
라테와 얼그레이 파운드케이크였나, 암튼 케이크도 하나 시켰다. 케이크는 드시지 마세요. 절대. 다 남겼다. 창가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자리가 빠지질 않았다. 커피를 마시고 시간을 조금 보내다가 내려왔다.
카페 입구의 분위기는 참, 좀 그래요. 그렇지만 바다 뷰를 보러 한번 가볼만하다.
다시 봐도 다소 충격적인 외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니 일단 들어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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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러 와준다고 했지만 역시 좀 걸어보기로 했다. 일단 날이 정말 좋아졌고, 미세먼지도 양호하고, 무엇보다 볕이 끝내주게 좋다. 아까 오면서 끝없이 이어져 있던 해변을 따라 좀 걸어보기로 했다. 강릉에 오면서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많이 걷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춥고 비가 와서 많이 못 걸었고 오늘 비로소 날을 제대로 잡았다. 주문진부터 해변을 쭉 따라 걸으면, 어차피 계속 바다가 이어져 있으니 길을 잃거나 할 이유도 없다. 일단 주문진항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이런 풍경 왜 이렇게 좋나요.
빽빽이 고속버스 들어차 있고요.
주문진항을 지나 계속 걸었다. 계속 계속.
다리를 건너며 그물 낚시하시는 아저씨들도 만나고.
눈으로 봐도 맑은 바다도 구경하고.
어떻게 내려가셨는지, 바위에서 혼자 낚시하고 계신 아저씨도 지나고.
바다는 끝이 없이 이어져있었다.
드문드문 사람들.
여기도 아저씨 혼자 낚시, 낚시 재밌을까. 흐흐.
나도 뒤에 멈춰 서서 바라봤지만 미동도 없이 앉아 계신다.
바다 쪽으로 가까이 내려가봤다. 누구의 소파일까. 누가 여기 앉아 매일 바다를 바라보려나. 해변까지 낑낑대며 소파를 들고 왔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귀여워.
고운 모래 해변을 걷는데, 너무너무 너무나도 신발이 벗고 싶어질 만큼. 날이 좋고 따뜻했다. 바다에는, 혼자 걷는 아저씨.
가족, 그리고 커플들이 있었다.
보정이 필요 없는 바다와 하늘.
바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본다. 파도 조하.
어디나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부지.
먼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도깨비 촬영지 영진해변까지 왔다. 줄을 서서 사진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바위에 부딪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정말 예쁘긴 했다.
영진해변을 따라 걷다가, 야트막한 담을 넘어 들어가 걸터앉아 책을 좀 읽었다. 가볍게 금방 읽을 수 있지만, 여러 번 읽어봐야 할 책이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뭔지도 모르고 거부감이 들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하지만 알아야겠다.
[호감형 되기를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살아보니 알겠다, 이건 가르쳐야 하는 거였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호감형이 되기 위해 노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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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오전에, 다른 커플 손님과 함께 차를 타고 나올 때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연 속에서 걷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커플의 말에, 어우 좋네 둘이 진짜 잘 맞네요 여자 친구가 막 차 없으면 싫어하고, 걷기 싫어하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요.라는 말을 했었다. 이 무슨. 너스레를 떤답시고 쓸데없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예민하게 대꾸한 사람은 없었지만 내뱉어 놓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사실. 뭐 별거 아닌 말이지만, 순간적으로 흔히 만들어 놓은 여자의 이미지를 굳이 들춰내고 그렇지 않은 여자친구라 참 좋다, 라는 의미로 별생각도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왜냐면 그 자리에서 두 커플을 추켜세워주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 어색한 분위기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서 내가 호감형이 되어야 한다'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좋은 사람으로 좋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본능적으로 생각이 반응했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아직은 너무 어렵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도로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한 시간도 넘게 바다를 따라 걸었다. 걸으면서도 생각했다. 아, 너무 좋다. 정말 좋다.
바다 안녕, 혼자 사진도 찍어보고.
순식간에 파도가 들어와 내가 덮였다.
흐릿흐릿.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갈매기가 넘쳐나는 해변. 해가 살짝 기울고 나니 은근히 바닷 바람이 쌀쌀하기도 하고, 슬슬 다리도 아파서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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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루 도서관에 왔다.
흔한 강릉 도서관 바깥 풍경, 사방이 소나무다.
모루 도서관에 온 이유는 이걸 보기 위해, 《천재 유교수의 생활》베스트 5위 안에 드는 만화책이다. 유 교수님 사랑해요. 서가 사이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만화책 서가 사이사이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뭔가 사랑스럽다, 강릉 도서관.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많이 하고 있는 생각을 또 여기서 만나다니 깜짝 놀랐다.
"남의 마음을 두고 '알았다'라는 말을 하는 건 피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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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가능하면 판단 같은 거, 하지 말아야지. 그러니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서도 의연해져야지. 그래야지. 오래 오래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만났다. 나 사람 좀 잘 본다고, 입 밖으로 뱉었든 마음속으로 생각했든. 정말 그렇게 굳게 믿고, 약간의 자부심이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