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뭐가 좋냐면
강릉에서의 세 번째 아침, 주말이다. 처음 보는 창밖 풍경. 해가 나왔다. 드디어.
교양이도 햇볕을 즐기는 이 여유로운 아침.
모안 하우스의 맛난 조식 샌드위치를 해치우고 저 소파에 앉아 오래간만에 보는 강릉의 햇빛을 만끽했다. 뭘 해야 할까. 올라갈까, 더 있을까 고민. 특별히 강릉에서 해야 할 건 없지만 그렇다고 또 딱히 올라가고 싶지는 않아서 강릉에서 주말을 보내 보기로 했다. 토요일은 점심까지 빈둥거려야 제맛. 사실 어제 빗길에 제대로 넘어졌는데, 정말 누가 봤을까 무섭게 옆으로 제대로 슬라이딩. 0.1초 만에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못 봤다. 너무 쪽팔려 몰랐는데 팔꿈치에 멍도 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왼쪽 팔과 어깨가 욱신욱신 거린다. 핑곗김에 게으름을 부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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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되니 도미토리룸에는 다른 손님들이 왔다. 특수 교사를 하고 있다는 자매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패럴림픽을 보기 위해 전주에서 올라왔다는 자매, 전주에서 어제 6시 30분에 출발했다는데 새벽 1시나 되어서 강릉에 도착했다. 전주에서 서울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에서 강릉으로 내려왔다고. 허허. 그렇게나 교통 편이 안 좋구나. 다락방에는 앳된 커플 손님이 왔다. 센스 있게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온 귀여운 커플은 무계획으로 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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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지씨 덕분에 차를 타고 편하게 남항진에 왔다. 감자 옹심이를 먹으러.
옹심이는 처음 느껴보는 식감이다. 옹심이도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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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은 커녕 며칠 있을 건지도 제대로 정하지 않고 왔는데, 효지씨 덕분에 어디든 가고 있고, 뭔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완전히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내내 우울했을까. 의식적으로라도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강릉에 가야겠다, 충동적으로 마음먹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날들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었는데, 정말 정말 감사하게도 누리고 있다.
덕분에 테라로사에도 왔다. 테라로사는 위치 때문에라도 포기하고 있었는데.
"25분 걸리는데 괜찮으세요"
거대 공장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카페에 들어오고 주문을 했더니 커피 한 잔에 25분이 걸린단다. 물론 괜찮지 않지만 괜찮습니다. 진동벨을 들고 주변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게 카페 앞 풍경이라니. 졸졸졸. 봄이 오는 소리. 시냇물이 흐르고 밤 나무가 무성한. 여긴 꽃 피는 계절에 다시 와야 할 것 같다.
느낌 있는 외관. 카페 주인은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시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런 감각은 거저 얻는 게 아니니.
이전 테라로사 건물이었다는 맞은 편의 작은 건물을 기웃댔다. 예전에 아기자기한 분위기도 참 좋았을 것 같다.
지금은 별 수 없이 커피 공장.
굿즈를 구경했다. 기념품 숍도 있고, 레스토랑도 있고 뮤지엄도 있다. 따로따로. 에코백을 하나 살까 했지만 너무 전면에 내세운 terarosa 로고 때문에 고민하다가 내려놨다. 마침 벨이 울린다.
2층 노키즈존에 올라와서 꼬순 아이스 라테를 마셨다. 실제로 25분이 걸리진 않았다. 25분 기다릴 거 조금 덜 기다렸더니 기분이 좋았다. 단순한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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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지씨 덕분에 차로 가야 갈 수 있는 곳 들을 실컷 들르고 다시 숙소 근처까지 왔다. 집 근처 시립도서관에 들렀다. 강릉 도서관의 특이점 발견, 만화책이 많다. 둘러보다 보니 보고 싶은 만화책이 잔뜩이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다섯 권을 꺼내 와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흥 이게 뭐야 유치한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5권까지 다 읽고 나니 눈물 훔치기 바빴다. 참 모를 일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점점 더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하나있다. 어떻게 살 건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혼자 잘 살기 위해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다. 분명. 그렇다면 이건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어떠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열심히, 제대로 살아야만 쓸모 있는 인간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 나답게 살 수 있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을 수 있다. 쓸모를 고민하기보다는 나답게를 고민하는 게 맞는지 모른다. 존재로서 의미 있다. 예전에 유행했던 말이 생각난다. 모두, 우리 존재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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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가고 있는데 길가에 동네 서점이 보였다. 갑자기 임경선님의 책이 읽고 싶어져서 들어갔는데 임경선 작가님의 책은 한 권도 없다신다. 한 권도. 크흑.
정신 차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임경선 작가님의 글이 생각난다. 정신이 차리고 싶은가보다.
숙소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안마 의자에 앉아 있는데 뭔 호사를 누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소중한 시간. 멍해있다가 한 번씩 정신이 들 때마다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해서 좀 꿈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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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을 쓰는 자매가 하루 종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12시가 다 되어서 들어왔다. 씻고 내려온 둘째와 얘기를 나누는데, 아... 마음속 깊이 예쁘다 참 예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예쁘게 말하고 참 예쁘게 웃고. 나까지 기분 좋아지는 밝은 에너지가 넘치게 전해져 왔다. 뭘까, 뭐가 이렇게 예쁜 걸까 생각하는데, 그녀의 말끝마다 감사가 있다. 감사. 감사가 있는 사람은 다르다. 생기가 있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내 공로가 아니니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니 현재를 누릴 수 있다. 예쁘다. 나도 예뻐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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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통화를 했다. 얼른 집에 오라고, 언제 올 거냐고 하실 줄 알았는데 주말에 교회 별일 없으면 잘 누리다가 오라신다. 그런 감사한 시간이 또 있겠냐고. 난 아직도 이렇게 아빠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