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봄비입니까 : 강릉

강릉은 뭐가 좋냐면

by 노니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데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앗, 비 그쳤나 보다 하고 내다보니 눈이 오고 있다. 살짝 눈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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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이랑 토스트랑 요플레까지. 꽤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호스트 아주머니 병문안을 갔다. 호스트 아주머니는 병원에, 나는 아주머니네 집에, 아주머니를 만나러 '병원'으로 가는 이 신기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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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팥죽을 사고, 팥죽과 함께 먹을 찐빵도 샀다. 찐빵집에 찜기가 엄청 쌓여 있었다. 여기 맛집인가벼. 바로 쪄낸 따끈한 찐빵은 몇 개라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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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돌아가는 길, 6층 복도에서 바깥을 내다보니 왼쪽으로는 바다가, 오른쪽으로는 눈 덮인 산이 보였다. 병원 경치하고는. 병이 절로 나을 것 같은 풍경이긴 했지만,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경치만으로는 병이 나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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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도 시립미술관까지 태워다 주셔서 넙죽 타고 내려왔다.

1971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러시아 혁명에 주목하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계급투쟁과 계급 적대를 근현대사와 당대에 일어난 노동 운동들을 통해 고찰하고자 하는 전시, 「october」가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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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학생 여러분들의 충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목격한 이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싸우다 죽었는지 역사의 증인이 돼주시기 바랍니다.

_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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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병에 불이 붙는 작품의 제목, <꽃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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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나도 없는 전시장을 조용히 돌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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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전히 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미술관이 언덕 위에 있는 터라 강릉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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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조금 춥긴 해도 미세 먼지 없는 게 제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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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작은 마당이 있다. 날씨 좋은 봄에 오면 앉아서 쉬기 좋을 것 같다. 일단 여기,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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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에러, 계속 추적추적한 강릉에 흰 운동화를 신고 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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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분위기 있는 뒷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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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맞은 초록이들이, 바닥에 얇게 쌓인 눈을 뚫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봄이잖아. 추워도 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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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 미술관 관람을 끝내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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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골목길 풍경이 뭔가 예스럽고 좋아 골목마다 기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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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페인트칠 벽을 짚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골목 끝에 파란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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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철장도 노란 페인트로, 장독대 덮은 대야에는 돌을 두 개 올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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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과 옐로, 아찔한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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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골목 안에는 녹슨 낡은 대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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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 벽과 뜯겨나간 방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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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으슥한 골목, 어느 담장 위에 꽃 같은 것이 보여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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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꽃, 같은 나뭇잎.

골목은 무방비 상태였다. 지나는 나에게는, 낡은 골목의 풍경이 낭만적일 수 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위협적일 풍경이었다. 시내와 아주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렇게 무방비였다. 예상보다 강릉은 무방비상태인 곳들이 많았다. 화려한 강릉역에서 딱 한 블록 지나 들어오면 바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나오질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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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디저트 카페를 찾아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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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한지 오래되지 않은 듯, 구석구석 엄청나게 깔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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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감각 죽이고요. 좀 기분 좋아지는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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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이라는 블루베리 에클레어와 아메리카노 주문. 내가 에클레어를 뭐 몇 번이나 먹어봤어야지. 에클레어 비전문가인 내 입에는 깔끔하니 맛있었다. 요게 7,000원. 부들부들. 나이프와 포크를 주셨기 때문에 나이프로 몇 번에 잘라먹긴 했지만, 사실 한 입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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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꽤 힙한 카페 같았는데 사람이 전혀 없었다. 날이 궂어서 그런가.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가. 뭐 저는 좋지만요. 한가하고 나른한 카페 안에서 카운터에 서 있던 스텝이 커피와 디저트 하나를 꺼내와 테이블에 앉아, 에끌레어를 우걱우걱 몇 번에 베어 먹었다. 역시. 직원 할인가 있나요. 7000원짜리 디저트 그렇게 두 입에 배어 먹기 있나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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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앞 전신 거울이 마음에 들어서 다시 한방. 구석구석, 나 신경 써서 인테리어 했음 포스가 폴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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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1분 거리에 영화관이 있다.「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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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무니와 핼리의 일상에 무지개가 뜨기를, 하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저 내 욕심인가 싶어져서. 화면 속이 정말이지 너무 달콤해서 실 없이 웃음이 나온다. 쓴 약 위에 핫핑크 설탕 코팅을 씌워놓은 마냥. 참 달콤한데 사실은 쓴맛.

누군가의 한 줄 평 이 꼭 내 마음 같아서 옮겨본다, '무니' 앞에 펼쳐진 세상을 위해.

쓰러진 나무 위에 걸터앉아 '내가 이 나무를 왜 좋아하는지 알아, 쓰려졌는데도 계속 자라거든' 하고 말하는 아이. 쓰러져도 죽지 않고 자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그런데 말이지, 조금 슬픈 건 쓰러진 나무는 위로 자라지 않는다. 누운 채로 자란다. 물론 죽은건 아니다, 언젠가 다시 위로 위로 자랄지도 모른다. 생명 자체와는 상관없지만 보통의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은채, 위로 자란다. '보통의 나무', '보통'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폭력적인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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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전화가 와 있어서 영화를 보고 나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추우니까 옷을 사 입으란다. 춥게 다니지 말고. 어쨌거나 조심히 다녀. 언니의 당부가 왜 때문에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지. 그러고 보니 오드리가 미소가 피어나는 여행 되라 했는데 나 오늘 몇 번이나 웃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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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쌀쌀한 거리를 걸어 밥을 먹으러 왔다. 어쩜 단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비가 온다니! 오픈한지 얼마 안 됐다는, 인스타에 나오는 그런 인테리어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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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에 손님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한참 기다렸다. '저 여기 있어요' 어필을 하는 눈빛을 몇 번 사장님께 보냈다. 그런데도 좀처럼 다가와 주시지 않는다. 바쁜 건 알겠는데, 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지. 말이라도 좀 해줄 수 있지 않은가 싶어서 결국 사장님을 불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오신 사장님께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여쭤봤더니 15분을 말씀하신다. 이미 꽤 한참을 아무 고지도 없이 기다렸는데, 불러서 여쭤보니 15분. 제가 안 물어봤으면 저는 30분을 그냥 기다려야 했을까요. 사람이 많으니 좀 기다려주십사 먼저 말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답니까. 여행 와서 이런 걸로 성질부리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날카롭게 말을 했다. 사장님께서는 많이 당황을 하셔서 음료 서비스를 주겠다고 하셨다. 아뿔싸. 기분이 정말 상해버림. 아닙니다, 하고 가방을 들고 나가는데 사장님이 말리신다. 기분 너무 상하셨잖아요. 드시고 가면 좋은데. 10분이면 되는데, 정말 미안한 얼굴로 말씀하시는 사장님. 엄청 친절하신 분이실 것 같다. 잘 알겠다, 그런데 그냥 더 이상 이곳에서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나왔다. 나중에 찾아보니 어제가 가게를 오픈한지 딱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어휴. 오픈 3일째라니, 많이 정신이 없으셨겠다. 대신 다음부턴 손님이 밀리면 오래 걸릴 수 있으니 기다려주십사 안내 먼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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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꽤 유명한 집이라고 했는데 손님이 없었다. 날이 이래서, 오늘은 어딜 가도 사람이 없다. 잘 먹었습니다. 아기자기 예쁘게 꾸며 놓은 얼라이브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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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나와 집까지 걸었다. 대체 아깐 뭐가 그렇게 예민해졌던 걸까. 하루 종일 춥고, 마음이 조금 빡빡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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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밤에 먹을 주전부리를 샀다. 커피 우유가 먹고 싶었는데, 편의점에는 세븐일레븐에서 나온 커피 우유 밖에 없었다. 보통의 커피우유보다 조금 덜 단 건 좋았지만, 뭔가 맛이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과자. 뭔가 짭짤한 과자가 먹고 싶을 때 가볍게(?) 먹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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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지 씨랑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방으로 올라왔다. 좋은 사람이다 효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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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지 않는 빗소리, 밤이 깊어간다. 내일은 손님들이 더 오신다고 하니 혼자 하는 마지막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