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뭐가 좋냐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세미세앱으로 날씨를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오예. 미세먼지 좋음. 오늘은 좀 돌아다닐 기분이 났다. 어제 내 우울의 8할은 미세먼지 때문. 여튼 오늘은 뭐라도 할 수 있겠어.
모안하우스의 소문난 조식, 치아바타 샌드위치는 52block에서 살 수 있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먹었지만 직접 사러는 처음 와봤다. 다른 빵들도 다 맛있어 보였다. 복층으로 되어 있는 베이커리 1.5층은 카페로 꾸며져 있었다. 오전 7시 오픈이라는 것도 상당히 매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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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나눠 먹고 첫 일정을 위해 집을 나섰다. 따뜻해진 날씨에 집 앞 매화가 몇 송이 꽃을 터트렸다. 오늘의 목적지는 선교장.
미세 먼지 없구요, 날씨 맑구요. 날씨에 취해 엄청 기분 좋게 매표소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정말 좋지요. 차분히 대답하셨다. 날씨는 좋은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요.
선교장은 강릉 지방 명문으로 알려진 이내번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하는 집이다. 열화당· 안채· 동별당· 활래정 등 모두 4채로 되어 있는 선교장에는 102칸 방이 있고, 하인들이 살던 집들까지 모두 합치면 300칸에 이른다는 엄청 엄청 큰 집이다. 현존 한옥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큰 집이라고.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문만 12개가 있을 정도라고 하니 뭐.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의 수, 연면적, 대지면적까지 무엇 하나 국내 최고이자 최대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저 연못에 연꽃이 피겠지, 아 연못이 있는 집이라니. 그 위에 정자라니. 이곳이 <활래정>, '주자의 시구절 '爲有源頭活水來 : 샘이 있어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서 따왔다고 한다. 흐르는 물. 여름 나절에는 양쪽으로 문을 열어 두고 누워 진동하는 연꽃향을 맡을 수 있겠니. 이런 경치에, 분명 더 파란 하늘이었을 텐데. 분명 더 푸른 나무들이었을 텐데.
정자에는 부채 모양의 현판이 달려 있었다. 월하문. 오매 오매 멋져. 달밤에 연꽃이 핀 연못 위의 정자에 들어앉은 나를 상상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봄기운이 완연한 선교장을 걷고 걸었다.
나무 끝에 봄의 붉은 기운이 맺혔다.
여기저기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봄을 발견하는 기쁨.
아직도 이곳에서 살고 계신 분들이 있다. 그분들의 장독.
처마 그림자가 귀여워서.
고택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모양의 차양이 보였다. 서양의 영향을 받은 걸로 생각했는데 집 앞에 차양을 세우는 건 의외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방식이라고 한다. 다만 지붕을 구리로 만든 것 때문에 이 차양이 특별한 건 사실. 이 당시 구리는 엄청나게 비싼 재료였는데, 구한말 선교장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러시아 공사가 답례품으로 선물한 구리로 저 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차양이 쳐져 있는 저 건물이 열화당. 검색해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출판사 '열화당'의 대표 이기웅 님이 이곳, 강릉 선교장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
검소하고 절제된 삶, 그 속에서 자긍심과 자존감을 배웠던 선교장에서의 유년시절은 자연스럽게 그를 출판계로 이끌었다. 특히 그곳의 서재이자 작은 도서관이었던 열화당의 장서를 관리하며 자연스럽게 책과 가까이 지냈던 어린 시절 덕분에 1971년 출판사 열화당을 차렸고, 미술 전문 출판사로 자리매김하며 출판업계에 건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출처 : 네이버캐스터)
합성해 놓은 것 같은 하늘.
언제까지 불을 땠을까. 그슬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아궁이도 있고,
집 사이사이 틈으로 보이는 푸르름에 어디고 참 좋은 경치.
선교장 가장 위쪽까지 올라가 보면 무척 소박하게 만들어진 방이 한 칸 있다. 기와도 얹지 않은, 이름도 참 소박한 <노야원>
그 뒤로는 오죽이 바람에 서로 몸을 비비고 있다. 빼곡히 심긴 나무 잎들이 서로를 스치는 소리가 얼마나 얼마나 듣기 좋은지.
선교장 뒤쪽을 빙둘러 잇는 짧은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두 바퀴를 돌았다. 키가 큰 소나무 끝을 올려다보면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있다. 촘촘히 심긴 대나무의 댓잎 사이로 부서지는, 반짝이는 햇빛을 보려고 고개를 젖혔다 바로 했다를 반복했다. 맑은 공기를 깊이깊이 들이마시며 걷고 걸었다.
또또 걷고.
사람이 별로 없던 선교장에 데이트하는 커플이 등장했다. 선교장 산책 데이트라니 어쩜, 너무 낭만적이다.
선교장에서 나와 밥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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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아닌 추천받은 산수갑산으로.
며칠 전부터 짬뽕이 먹고 싶어서 찾았는데, 막상 도착하니 짜장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길 재간이 없다. 짜장.
어마어마하게 오래되어 보이는 짜장면 집이었다. 식사 때를 지난 시간이라 한두 자리, 채워져 있던 테이블이 금방 비워지고 혼자 앉아 짜장면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데 나 참. 여기는 탕수육이 맛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탕수육이 너무 먹고 싶은 거다. 이미 짜장면을 클리어 한터라 바로 먹기는 무리고 탕수육 작은 사이즈를 포장했다.
중화요리 산수갑산. 짜장 맛있었다.
강릉여고 앞이라 그런지 작은 서점이 있길래 들어갔더니 온통 참고서 밖에 없다. 나가려는데 입구 한쪽 귀퉁이에 임경선님의 책이 딱 한 권 꽂혀 있었다. 고민 없이 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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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지씨가 집에 있으면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집에 없다. 이따가 같이 먹기로 하고 별 수 없이(?) 식기 전에 맛있을 때 나 먼저 한 접시를 먹어 보기로.
특이하게도 파 맛이 강하게 났는데, 그게 별미였다. 특유의 신맛이 아니라 달고 짠맛이 나는 소스, 조금 독특한 맛이었는데 맛있었다. 다음번엔 매장 가서 따뜻할 때 바로 먹고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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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저녁을 먹고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갔다. 효지씨 말로는 포남동에 괜찮은 카페가 많지 않다고 했는데, 생긴지 얼마 안 된 힙한 공간이었다. 오픈한지 딱 한 달, 웨이브 라운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꽤 읽고 싶은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센스 굿굿.
공간이 널찍해서 좋았다. 아직은 손님이 많지 않아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시끄럽지 않고, 음악 좋고, 공간이 넓고 높고, 창이 크고. 적당히 어둡고. 오예. 늦게 알아서 아쉽지만 일단 올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와보겠다고 다짐했다.
카페에 있다가 잠깐, 호스트 어머니 댁에 다녀오느라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를 걷다가 열려 있는 학교 교문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 있는 운동장 너머로 어김없이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강릉은 소나무가 지천. 또 그 너머로는 핑크빛으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금 보니 꽤 쓸쓸한 풍경 같기도 하지만, 하늘색이 너무 예뻐서 그네에 앉아 대롱대롱 매달려 해가 넘어가는 걸 보다 일어섰다.
학교 앞 분식집을 지나, 다시 웨이브 라운지로 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더 시켰는데 오모나. 낯선 카페에서 익숙한 컵을 만났다. 최애 카페 크로스로드의 카키색 컵과 꼭 같은 컵. 컵만 봐도 반가웠다. 강릉에서 홀로 크로스로드 앓이, 안 간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니 하면서. 흐흐. 서울에 크로스로드가 있다면 강릉에는 웨이브 라운지가 있다. 꽤나 마음에 들었다 컵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바깥에 어둠이 내리자, 카페 안은 또 다른 분위기로 변했다. 이것도 좋네. 내일 또 올 거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혼자 비장하게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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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오늘도 교양이 산책을 나갔다. 기분 좋은 밤 산책. 강릉에 온 지 일주일 밖에 안되었는데 뭐 이리 일상 같은, 익숙한 매일 매일인지 모르겠다. 산책을 하고 돌아와 남아 있는 탕수육을 데워 효지씨랑 나눠 먹었다.
도미토리룸에 손님들이 들어오셔서 1층에 내려와 아까 산 책을 조금 읽었다. 안마 의자에서 노곤노곤해질 때까지 안마를 받고, 깜빡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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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올라올 거냐는 물음에 '나도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낯설지만 행복하다. 강릉에 내려온 지 칠일째, 신기할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