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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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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May 10. 2018

금방, 마음 풀길 잘했다 : 제주도

제주는 뭐가 좋냐면

주일 아침, 늦잠을 잤다. 체크아웃 하는 날이기도 하고. 아침 산책은 패스하고 푹 자고 일어나서 마지막 조식을 먹었다.

4일 동안 머문 방을 정리하고,  

우도를 좋아한다는 호스트에게 우도 엽서를 남겼다. 세 장짜리 엽서를 가로로 이어붙이면 길게 뻗은 해변 풍경이 그대로 그려져있는 엽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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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륵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예배 시간에 맞춰 내려왔다.

집에서 나오면 바로 저어기 멀리서 바다가 보인다.

숙소 근처에 있었던 토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성가대가 따로 없어 예배 중간에 엄마 아빠 아들, 한 가정이 나와서 특송을 불렀다. 서툰 실력의 찬양, 가사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새삼 참 신기했다.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앞다투어 하는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겠구나 하는 생각. 한자리에 모인 모두가, 누구랄 것도 없이 한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이라니. 괜히 또 뭉클.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고 가라는 교회 어르신을 만류하고 나왔다.    

표선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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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를 끌고 버스를 탔다. 목적지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중간에 환승 예정. 환승지에서 내려보니 다음 버스는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짐은 무겁고. 카카오 택시가 잡히는 곳이라 금방 택시를 불렀다. 청수리까지 간다는 말에 어김없이 듣는 질문. 청수리는 뭐 하러? 표선 만큼 시골 마을이라는 청수리. 거기 뭐 아무것도 없는데 캐리어 끌고 거긴 어쩐 일로 가냐고. 숙소가 그쪽이라는 말을 하니, 또 물으신다. 거기 여행객이 묵을만한 데가 어디가 있냐고. 에어비앤비라는 개념을 아실까 싶어 설명하려다가 그냥 얼버무렸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묵는지 궁금하신 건 아닐 거다 싶어서. 계속 질문이 이어진다. 혼자 여행 왔냐고, 왜 혼자 왔냐고. 딱히 입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답하신다. "아 히일링 여행 왔구나." 힐링이라는 말은 왜 때문에 남의 입을 통해 들을 때면 이렇게나 더 오글거릴까. 하하하. 멋쩍게 웃었더니 금새 공격이 들어온다. 남자 친구는? 어른들은 정말이지 참. "그냥 혼자 하는 여행도 좋죠." 좀 성의 없이 대꾸했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상한 분은 아니었다. 질문이 좀 많으셨을 뿐. 전혀 열렬히 반응하지 않는데 지치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셨다.
어쩜, 기사님들의 레퍼토리는. 내 신상을 묻고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식 자랑. 딸 둘이 시집을 기가 막히게 잘 갔단다. 둘 다 서울 사는데 강남 어디라고, 또 남편 직업이 뭐였더라, 들었는데 까먹었다. 얼마 전 사위 생일에 각종 신선한 해산물에 뭐 이것저것 해서 올려다 보냈다고. 사위가 일이 많아 늘 늦게 퇴근하는데 그날은 일찌감치 들어와맛있게 먹었다고. 택시 기사님 자제분들은 어쩌면 그리도 다들 번듯한지. 적당히 감탄사를 넣어가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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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라는 공간은 여성들에게 꽤 위협적인 공간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건 아니겠지만. 원래도 혼자 택시 타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몇 년 전 늦은 시간에 혼자 탄 택시에서 기사님께 큰 공포를 느낀 뒤로, 솔직히 택시라면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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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혼자 택시에 탔었더랬다. 타자마자 기사님께서 방금 내린 손님에 대해 욕을 섞어가며 말하더니, 그런 뭐 같은 새끼 때문에 자기는 항상 준비를 한단다. 트렁크에 연장이 들어 있다는 둥, 저런 놈 하나 죽이는 거 별거 아니라는 둥. 목을 딴다는 둥, 머리를 어떻게 한다는 둥. 하아. 백미러로 힐끗힐끗 나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 몸이 굳었다. 얼어 붙은걸 티 내지 않으며 비위를 맞춰 생글거리며 집 근처 골목에 내리고 안도했던  순간이 자꾸 한 번씩 생각난다. 그 뒤로 되도록이면 혼자 택시에 잘 안 타려고 하지만 불가피하게 타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 타자마자 재빠르게 앞쪽에 붙어 있는 기사님의 택시 자격증(?) 사진과 얼굴을 대조해 본다던지. 밤늦은 시간에는 보란 듯이 전화 통화를 하며 상대에게 택시에 탔으니 몇 분 안에 도착할 거라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뭔가, 최대한 기사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공손히 굴게 된다. 사실 보호라고 말하고 있긴하지만 내 쪽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간절히 별 일 없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 뿐. 한번씩 입장 바꾸어 생각하면 당하는 기사님 쪽(?)에서는 참 억울한 일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혹은 벌어졌던 각종 사건 사고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들었고,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에 도착한 첫날, 밤 11시가 다 돼가는 시간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달리는 택시 기사님께 나도 모르게 ‘제주도 사는 친구네 집'에 가는거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전혀 위협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알리고 싶었다. 내가 말한 목적지에는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노라고. 오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냥, 이런 사람도 있는거다. 그리고 나보다 더 한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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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도, 무사히 청수리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에 들어가니 인상 좋은 호스트가 반갑게 맞아줬다. 다행이다. 새 숙소도 마음에 든다. 짐을 내려놓고 일단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바로 밖으로 나왔다.

표선도 좋았지만, 이 동네 좀 되게 마음에 든다. 느낌이 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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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근처 수제버거집에 갔더니 브레이크 타임에 딱 걸려서 터덜터덜 되돌아 나와야 했다. 숙소로 들어가 쉴까 하다가 근처에 있는 추사관에 가보기로 했다. 알쓸신잡에서 보고 들러야지 마음먹었던 곳. 한참 기다려 올라탄 버스 기사님, 엇. 구면이다. 아까 청수리 들어올 때 타려다가, 30분은 더 기다려야 출발한다고 해서 못탔던 버스의 기사님이셨다.  제주도 진짜, 원래 이렇게 좁은 겁니까. 자꾸 얼굴 아는 버스 기사님이 생기고 그러는 상황. 기사님이 먼저 반갑게 인사해주셨다. 짐 놓고 나온거냐고.

청수리에서 숙소 앞에 다니는 버스는 노란색 관광지 순환버스였다. 오전에는 1시간 간격으로 다니지만 그 이후 시간에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크. 정말 잘 타고 다녔다. 여기서 30분 간격이면 이건 거의 택시(?) 수준. 기사님께서 집 앞 정류장에서는 9분, 39분에 타면 된다고 일러주셔서 그것만 기억했다. 9분,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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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마을, 낮은 집들 사이에 추사관이 평화롭게 솟아있었다.

소박한 외관, 세한도에 그려진 투박한 건물과 창 형태 그대로, 소나무 두 그루도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보이는 곳은 최대한 심플하게. 관람객들이 들고 나는 전시실은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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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붙어 있는 무슨 건축상 안내를 굳이 보지 않더라도 참 잘 지어진 공간이라는게 절로 느껴졌다. 공간이 참 넉넉했다. 텅 비워진 공간에, 추사를 잘 담아내고 있었다. 여유 있게, 최대한 비워내서 넘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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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내부에는 추사가 쓴, 같은 글자 탁본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제주로 귀양 가기 전에 썼다는 오른쪽의 화려하고 거칠고 웅장한 필체, 귀양살이 후 썼다는 왼쪽의 차분하고 빈틈 많고, 여유 있어 보이는 필체. 두 글씨를 나란히 놓은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추사는 제주도 귀양을 통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게 필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대부분 알고 있듯 추사체는 제주도 귀양 시절 완성되었다고 하니까.

필체에 대해 잘 모르지만, 모든 이치가 그러하다. 꽉 차면 그 다음은 넘치는 것 뿐이다.  스스로 비워내거나 넘쳐 흘러 비워지기 전까지는. 속에 꽉 차있는 것들이 목구멍서 간당간당 찰랑대니, 무얼 해도 버거울 수 밖에.

사는 게 버거운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내 안에, 찰랑 찰랑 입구까지 가득찬 물이 넘칠 듯 일렁이고 있었다. 넘칠까 두려워 사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를 비워내지 않으면 그분을 담을 곳이 없어진다. 그리고 안이 가득 찬 그릇은 더 이상 그릇으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거다.

대체 뭐가 문제냐고 버럭버럭 묻는 내게, 내가 누구인지 그분이 누구이신지 다시 한번 새겨주신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질그릇이었다.  그릇은 그릇으로의 역할을 할 때 편안해지는 법. 그냥, 사는 게 어려운데는 이유가 있는거였다.

우레 같은 음성이 들리는 건 아니지만. 무릎을 탁 치는 정답을 알게 된건 아니지만 걸음 걸음 새기게 되는 마음들이 있었다. 그 마음을 놓치기 싫어 매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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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관에서 나와 조금 더 걸어 낯선 마을에 들어섰다. 신평리.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 앞에서 날이 슬슬 저문다. 그 따뜻한 배경을 두고 강아지와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가는 풍경이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평화로운 순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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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청수리, 여긴 귤나무가 많은 동네다.

이건 도로변에 심어져 있던 낑깡 같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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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놓친 끼니를 챙기기 위해 부지런히 수제버거집에 들어섰다. 으아 배고파. 혼자 기대에 가득 차 문을 여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문과 마주 보고 있는 카운터 직원이 빠르게 인사를 하고, 내가 카운터에 다다르기도 전에 바삐 메뉴를 담은 태블릿 피씨를 들이밀며 메뉴를 설명한다. 버거와 사이드 메뉴 음료, 순식간에 설명이 끝이 났다. 아우, 정신 없어.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싸늘하게 내뱉었다.
손님이 터지게 많아서 내 뒤에 또 손님이 서 있었던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급한지 다다다다 설명을 끝내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직원을 보는데 순간 돌아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참고 대강 음식을 시켰다. 아, 마음이 영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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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버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갑질하는 손님인가. 내가 필요 이상의 친절을 기대한걸까. 내 쪽에서 원하는 친절이 아니라서 기분이 상한 것일까. 손님이 들어오면 빠르게 주문을 받는 것이 이곳의 스타일이고, 직원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일텐데 나는 왜 기분이 별로인 건가.
확실한건, 나는 참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서 확실히, 내가 갑질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는 것 같다. 특히 내가 고객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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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더 예민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불편한 것들에 대해 더 불편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불편에 대해 예민해지는 만큼, 상대에 불편에 대해서도 예민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생각이 안드로메다로 갈 뻔한걸, 양파 튀김이 잡아왔다. 맥주랑 먹는 양파 튀김이 너무 맛있었다. 사실 배가 많이 고팠다.

맛있는게 입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이 아름다운 여행의 순간에 짜증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으니 서둘러 기분을 풀었다. 손님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나만 남았다. 내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해가 참 예쁘게도 저문다. 금방 마음을 풀길 잘했네.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말랑말랑해진 마음으로 , 예쁘게 저물어가는 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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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반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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