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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May 29. 2018

청수리의 아름다움 : 제주도

제주는 뭐가 좋냐면

청수리의 아침이 밝았다. 

두 번째 숙소의 매력은 창밖에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가서 창문을 확 열어젖히는 것으로 일과 시작.  

귀여운 컵에 아침 물 한 잔. 

오자마자 몇 개 집어 주셨던 귤 인듯 귤 아닌 귤 같은 과일. 부엌 창가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이런 풍경이 좋고.

사방으로 창밖 풍경이 참 좋다. 넓은 거실 창, 아직 호스트들도 깨지 않은 이른 아침. 부스럭부스럭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아침 묵상 후, 동네 산책을 나섭니다. 방 안에서 내다볼 때도 예뻤지만, 요 숙소 마당 너무 좋았다. 이렇게 예쁜 풍경이 절로 주어지는 건 아니다. 아침에 나갈 때 보니 선글라스에 챙 모자까지 무장한 호스트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제거를 하고 있었다.  

유채꽃 밭을 구경하며 걷는데, 앗 저 멀리서 보이는 신기한 건물, 이 시골 마을에 pub. 펍. 펍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을 만큼 예쁜 건물이었다. 이따 밤에 와봐야지 다짐 또 다짐. 꽤 이른 시간에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이미 어르신들이 꽤 많이 나와계신다. 아침이 일찍 시작되는 이곳. 

_
오늘 일정을 시작했다.
숙소와 거리가 가까워 시간이 되면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던 곳. 걸어서 30분쯤, <제주 평화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날이 뜨거웠지만 마을 구경을 하며 가니 걸을만했다. 도착.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없는 조용한 주변을 기웃대며 매표소에 도착했다. 입장료 6,000원을 내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니 직원분께서 영상부터 봐야 한다며 시청각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셨다. 100여 명은 너끈히 수용할 만한 시청각실의 맨 뒤 가운데에 가방을 끌어안고 혼자 앉았다. 불을 끄고 영상을 트는데... 좀 무서웠다. 이미 들어오면서부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경계심이 생겨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몸이, 일제 치하 35년의 역사 같은 말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의 잔인한 장면들이 나오면 혼자 너무 무서울 것 같은데, 생각했는데 주로 상영된 내용은 박물관이 세워지게 된 이야기, 즉 관장님의 이야기를 촬영한 티브이 프로그램이었다. 

어느새 경계심은 풀리고 다른 의미에서 긴장감이 생겼다. 티브이 속 내용은 다소 
놀라웠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아버지는 일제 시대 동굴 진지 구축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2년 반만에 돌아왔는데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듣지 못하고 몸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거의 죽은 송장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아들은 돈을 번다.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돈을 벌고 어느 순간 강제 노역으로 만든 동굴들이 있는 산과 부지를 전부 사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인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멀쩡히 돈도 잘 벌고 회사도 운영하던 남자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니, 사람들이 쑥덕거릴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가 작은 연장에 의지해 동굴 속 모든 것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망가지게 한, 분명히 존재하지만 증명할 것이 없는 시간이 견딜 수 없어서 남자는 자꾸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아버지의 아픈 과거를 파내기 시작한 아들의 집요함이 만든 결과물이, 바로 <제주 평화 박물관>이었다. 

"자유와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크. 비장함은 있지만 세련미라고는 멘트다. 문장도 깔끔하지 못하다. 그게 포인트다. 영상이 끝나고, 직원분께서 다시 들어와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박물관 안내를 시작하셨다. 짧은 소개가 끝나고, 내부를 둘러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누군가 박물관 방문 후기에 이런 말을 써 뒀다. 망한지 오래된 놀이동산 같았다고. 뉴스 속에 나오는 평양의 건물 같았다고. 꽤 정확한 표현이다. 공감했다. 관리를 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 내부였다. 운영이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다소 비싸다고 느껴졌던 6,000원 입장료가 의미 없지 않겠구나... 싶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해야 할 일,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것. 관장님의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시간'이었다. 

땅굴 중 잘 만들어진 곳은 현재 자체 수리, 복원 중이라서 입장이 어렵고 나머지 한 곳만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쉽게도 들어가 볼 수 있는 땅굴은 안에 아무것도 따로 없다고 하셨다. 

혼자 가마 오름을 올라 땅굴 입구에 도착.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기는 한데, 정말 사람 하나 없는 오름 중간에 땅굴. 혼자 왜 이렇게 못 들어가겠던지. 쫄보가 되어서 주저주저하다가 계단을 내려가서 휘둘러보고 다시 올라왔다. 내려다 본 땅굴. 

올려다 본 땅굴 입구. 안에 벌레 있을 것 같고, 사람이 숨어 있을 것 같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급하게 몸을 돌려 뒤돌아 나왔다. 하. 

땅굴을 나와서 가마 오름을 걸었다. 상당히 정리되지 않은 모양새. 그건 또 그대로의 멋이 있으니까. 

나가는 곳으로 나갔다. 

박물관 건물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쓴 글귀인지,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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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이는 걷습니다. 제주의 풍경을 휘휘, 지나쳐가며 한참을 걷고 있는데 신기한 가게가 도로변에 있었다. 

뉴욕 할망. 장독대와 어울리지 않는 뉴욕 건물 사진과 감각적인 핑크색 폰트의 NEW YORK. 돌하르방 그림이 있는 가게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들어갔다. 유유히 걸어 들어온 나를 보시고 뉴욕 할망, 주인 할머니께서 놀라셨다. 서로 놀랐다. 나는, 여기 왜 이런 가게가? 사장님은 어떻게 걸어서 여길 지나가? 하는 반응. 걸어서 여행을 한다는 걸 신기해하셨다. 더구나 청수리를.

정체 모를 가게의 정체는, 뉴욕식 샐러드 비빔밥 집이었다. 궁금했다. 뉴욕식 비빔밥의 정체가.  

이것이 바로바로 뉴욕식 샐러드 비빔밥입니다. 맛있지만, 기억에 남는 특별한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빔밥은 맛이 없을 수 없다. 씹는 맛이 일품인 샐러드 비빔밥을 꼭꼭 씹어 맛있게 먹었다. 주인이신 젊은 할머니께서 정말 뉴욕에서 오래 살다 오신 분이라고 하셨다. 약간, 동네 사랑방인 듯 어머니들이 모여계셨는데 제주 이주민들이신 듯했다. 이런저런, 제주 살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걸 들어가며 든든히 배를 채웠다. 

사실 가려던 곳은 여기였다. 청수리 아파트. 현재, 청수리에서 가장 힙한 카페. 세련되기 그지없다. 

인테리어 훌륭하고, 음악도 좋고, 커피도 맛있고, 디저트도 맛있고. 

창밖 풍경이 너무 제주 제주해.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의자들. 

창가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날 햇빛이 꽤 눈부셨다. 햇빛 샤워, 조금 뜨겁다 싶을 만큼 한참 일광욕을 했다. 아이스 라테와 무화과 파이였던 것 같네. 냅킨도 포크도, 쟁반도 예뻤다.  

매번 감탄하지만, 예쁜 것이 만들어 내는 예쁜 그림자도 구경하고.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 근사한 곳이었다. 반쯤 읽었던 책을 가져갔는데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고 나왔다. 정말 좋았다. 인스타에서 자주 보이는 곳이라 사람이 많고 소란할까 했는데, 평일의 여행은 정말 진리다. 혼자 온 손님 한두 명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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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넌, 아바와의 만남이 있었는데 어떻게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까"
내가 1990년에 책에서 한 답변은 이렇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외로움과 실패로 두드려 맞아 멍들었기 때문이고, 낙심하고 불안정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예수님에게서 눈을 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나를 천사로 변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수술대에 마취된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가 쓴 것을 고수한다.(...) 이제는 그것을 세 단어의 답변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브레넌, 아버와의 만남이 있었는데 어떻게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 브레넌 매닝, 206p

이 천박한 은혜는 무분별한 연민이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값싼 것이 아니다. 공짜다. 그래서 정통파에게는 늘 미끄러지는 바나나 껍질일 것이고 어른의 감성에는 동화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은혜가 덮어 줄 수 없는 무엇이나 혹은 누군가를 찾으려고 아무리 있ㄴ느 힘을 다해 헉헉거려도, 그 은혜로 충분하다. 은혜만으로 충분하다. 그분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요한은 자신의 첫 번째 편지를 다음의 말로 마쳤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다시 말해서 이해할 수 있는 신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는 뜻이다. 아바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한다. 아바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은혜다>, 브레넌 매닝, 226-2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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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질문에 대해 굉장히 구체적이고도 강렬한 답변을 책 한 권에서 내내 말씀하고 계셨다. 나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다 아시고 말씀하신다. 그럴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모호함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해놓고, 다시 이렇게 모호한 답변에 감격한다. 믿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사실 은혜란 그런 것이다. 

근사한 공간에서 근사한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사실 이곳도 뚜벅이가 오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뚜벅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마음이 있으면 한 번쯤 들러봄 직하다. 카페뿐 아니라, 숙소도 함께 운영 중인데 안 봐도 뻔하다. 너무 근사할 것이다. 

하루가 길다. 여행의 후반, 더 힘을 내서 다녔던 건지 기록해야 할 순간들이 너무 많다. 끊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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