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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디브라운 Jun 17. 2018

왜 강릉이냐고 물으신다면 : 강릉탐방기

서울 여자 강릉 탐방

강릉에 이력서를 넣었다. 아니 강릉 모대학에서 올린 구인 공고에 이력서를 넣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백수가 된 지 벌써 7개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은 기분으로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강릉의 공고를 발견한 것이다. 대학에서 일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단지 ‘강릉’에서 일하고 싶었다. 




내 마지막 연인은 강원도에 살고 있었다. 주선자에게 ‘강원도에서 카페를 하는 남자’까지만 듣고 나간 소개팅이었다. 카페는 강원도 중에서도 이름 낯선 어느 시골에 있었다. 그냥 그 모든 걸 포함해서, 나는 이미 첫눈에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으면, 어느 날은 돌돌이(반려견)랑 꽝꽝 언 강 위에서 놀고 있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돌돌이(반려견)와 밭길을 뛰고 있다고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뀔 때 강에 얼음이 녹는 소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흙과 아카시아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비 온 뒤 무거워진 공기의 변화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카페는 느리게 돌아갔지만 시골 낡은 별장 같은 집에서 먹고 살기 부족함은 없다고 했다. 버는 만큼 살면 된다고,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살기 위해 그곳에서 혼자가 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계속 함께 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강원도를 발견했다. 그 사람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 듣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에게도 특별해졌다.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혹시라도 언젠가 서울을 벗어날 수 있다면’ 구체적이진 않지만 자주 꿈꿨다.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때는 그곳이 강원도였으면 좋겠다고. 


막 찍어도 그림 같았던 주문진항


혼자 떠난 첫 번째 강릉 여행, 하필이면 기록적으로 추운 날씨가 예보되어있었다. 덕분에 실내에 콕 박혀 에어비앤비 호스트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침을 먹으며 식탁에서, 밤늦도록 방안에서.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다음 날, 호스트 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지금 서울인데 차 한 잔 마실까요?” 

강릉의 에어비앤비에서 나눴던 대화를, 성북동 내 단골 카페에서 이어갔다. 수다의 끝에 어머니가 조르셨다. 오늘 밤 같이 서울 딸네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되겠냐고. 곧 다시 강릉으로 놀러 가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나서 헤어졌다. 그리고 두 달만에 다시 강릉을 찾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다른 곳이 아니었다. 강릉 어머니의 에어비앤비,였다. 작은 따님이 터미널로 나를 태우러 왔다. 같이 바다를 보러 가고, 같이 커피를 마시고, 같이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같이 아침을 사 먹고, 같이 다른 게스트들을 챙겼다. '삼일만 있다 가야지' 대충 세웠던 계획이 팔일이 되었다. 강릉에 가까운 친척 집이 생긴 기분이었다.  


강릉에서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볕 좋은 거실에 있던 분위기 있는 소파



밥을 먹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역번호 033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더니 ‘강릉’이란다. oo 씨냐고, 저희 쪽에 입사 지원하신 게 맞느냐고. 급여도 직종도 지역도 맞지 않아서 확인차 연락드렸다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원한게 맞다고 대답하고 안내를 들었다. 경력 없는 신입의 연봉은 거의 최저 임금에 가까웠다. 핸드폰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면접 보러 강릉에 오실 마음 있으신가요?”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꽤 오랫동안 그려왔던 순간, 강릉 여행에서 강아지와 함께 걸었던 산책길이 생각났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릴 때 보았던 바다 끝 하늘이 생각났다. 금방 도착할 수 있었던 바다와 소나무가 생각났다. 기다려도 잘 오지 않던 버스가 생각났다. 마중 나온 차의 창문을 내리던 호스트 가족의 얼굴이 생각났다. 조용하고 조그만 카페 안을 지키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밖이 어두워지면 조용히 카페의 문을 닫고 어두운 길을 운전해 또 아득히 고요한 자기만의 공간의 불을 켜던 그가 생각났다. 퇴근길 만원 버스를 타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와다다다 쏟아내면 전화기 너머로 느릿느릿 차분하게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아침마다 ‘오늘은 일하면서 예민해지지 마’ 카톡을 남겨주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버는 만큼 살면 된다고, 지금도 그렇게 자기가 선택한 대로 살고 있을 그 사람을 오랜만에, 생각했다. 면접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영진 해변에 놓여 있던 정체 모를 소파 둘
비오는 날의 툇마루 카페 창 밖 풍경
허균 허난설헌 생가 입구에 있는 키 큰 소나무 숲
안목 해변의 갈매기 무리, 실제로 보면 무서울 만큼 많았지만


면접 일정을 잡아 연락 주겠다던 직원분께는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덕에, 조금 구체적으로 강원도에 대한 내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강릉에 살고 싶다.' 어쩌면 언젠가는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언제일지 모르는 그 순간에 한 걸음쯤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서울 토박이가 왜 굳이 강릉을 기록하기로 했냐고 묻는다면, 먼저 몇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다음 찬찬히 몇몇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한마디로는 적을 수 없는 그리운 마음들 덕분에, 나는 당분간 강릉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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