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자 강릉 탐방
서울 근교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여전히 어린 시절 서울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30여 년을 쭉 서울서 살고 있는 아마도 거의 '서울 사람'이, 연고도 없는 강릉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늘 서울 말고 어디 한 곳쯤, 찐한 연이 닿는 곳이 있으면 하고 생각했던 터. 언제부턴가 자꾸 마음이 가는, 강릉에 하나씩 좋아하는 곳을 늘려 가보기로 했다.
왠지 순두부를 먹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검색해보니 반복되는 상호가 몇 군데로 좁혀진다. 평창 올림픽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내려와 첫 끼 식사를 했다는 순두부집이 있어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동화 가든> 몇 개의 블로그를 검색해보니, 기본 30분 이상 대기해야 한다기에 10시 반, 애매한 시간에 가기로 전략을 세웠다.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 '문재인 대통령 방문에 관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오기도 했고 시간도 애매해서 그런지 운 좋게도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대표 메뉴 짬뽕 순두부를 시켰다. 혼자 왔다고 하니 구석 쪽으로 안내해주셨다. 진한 짬뽕 국물에 면 대신 순두부가 듬뿍 담겼다. 이게 뭐 특허까지 낼 대단한 조합인지 의아했으나 맛은 좋았다. 함께 나온 밑반찬, 백김치와 고추장아찌가 순두부와 잘 어울렸다. 백김치를 한 번 리필하고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동안, 애매한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도 혼자 온 손님이 들어와 앉았다.
밥을 먹었으니 커피를 마실 차례. 10분쯤, 소나무 구경을 하며 걷다 보니 금방 <카페 툇마루>에 도착했다. 야트막한 단층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 외관도 내관도 인테리어에 힘을 주지 않아 소박한 느낌이었다.
이곳도 주말에는 줄 서서 먹는 곳이라는데 평일 오전은, 그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만큼 한산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낯익은 사람이 들어온다. 아니 강릉에 낯익은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하는 찰나 기억났다. 조금 전 식당 옆자리에서 혼자 순두부를 먹던 여행자였다. 그렇다면 검증된 동화 가든 - 카페 툇마루, 이 코스 추천.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 밟을 때마다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스산하니 분위기 있다. 크.
시그니처 메뉴인 툇마루 커피, 그리고 초당두부 케이크를 주문했다. 고소하고 달달한 흑임자 크림이 들어갔다는 툇마루 커피는 꿀맛이었다. 한 잔 마시고 또 생각나는 맛(다음 날 또 들렀다). 라테나 아메리카노 기본적인 음료도 맛이 좋다. 초당에 있는 카페 아니랄까 봐 두부 케이크라니 센스가 그만이다. 주문을 하면서 케이크에 두부가 들어갔나. 주 재료가 콩인가, 잠깐 상상해봤는데 실물을 받아보니 비주얼이 두부다 실은 치즈지만. 케이크도 기대 이상의 맛이다.
사실 특별할 건 없지만 뭔가 편안한 분위기다. 꽤 괜찮다, 또 한 번 가서 먹은 낯선 이름의 디저트 판나코타는 생크림과 설탕을 뭉근히 끓여냈다가 차갑게 굳혀 기호에 따라 소스와 가니시를 곁들여 먹는 이태리식 디저트라고 한다. 위에 인절미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으니 당연히 고소하고 달큰할 수밖에. 디저트들이 기본적으로 작고,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격도 좀 저렴한 느낌이다.
카페를 나와 5분 거리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초당 작은 도서관> 서울에서도 낯선 동네에 가면 도서관을 잘 찾아본다. 습관적으로 도서관을 찾고, 급할 것도 없으니 잠깐 들렀다 가기로 했다. 규모가 정말 정말 정말 '작은' 도서관이었다. 들어가면 입구에서 사서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 정도로 작다. 도서관 안은 숨소리도 안 들릴 만큼 고요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듯, 문제지를 펼치고 공부 중인 청년 하나와 공용 데스크톱 컴퓨터로 유튜브로 영상을 검색해보고 계신 아주머니가 계셨다.
작은 도서관의 서가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단 한 권도 빠지지 않고 사서 선생님의 손길이 닿은 듯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왠지 모든 책이 골고루 사랑받는 느낌이라서 행복해졌다.
도서관에서 나와 걸었다.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강릉 대부분이 그랬지만.
15분쯤 걸어가니 <허균 허난설헌 생가>가 나왔다. 금방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기념관과 생가가 함께 있었다. 아, 평일 한낮의 여행이여.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늴리리야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천천히 산책을 했다. 금방 생가를 빠져나와 죽 걸어나가면 작게 소나무 숲이 있다. 키가 큰 소나무들이 삐죽삐죽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강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가 생가 근처에 소나무 숲에 가보라고 추천해주면서, 피크닉 하기 좋은 느낌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강릉 스웩. 서울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피크닉 이미지는 한강이나 너른 잔디밭 공원이 전부였는데 이 생소한 느낌의 소나무 숲 피크닉이라니. 날 좋은 6월쯤, 제대로 우거진 소나무가 만드는 그늘 아래, 소나무 숲 피크닉을 꿈꾸며 생가를 빠져나왔다.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아무 곳이나,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좁은 길목에 있던 <9남매 집>. 아침도 순두부였지만 초당동이니까, 합리화하며 저녁도 순두부 전골을 시켰다. 사실 원래 두부를 좋아한다. 순두부 전골은 2인부터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지만 전골이 먹고 싶었다. 혹시 1인분 되느냐고 물으니, 감사히도 1인분을 끓여주셨다.
감격스럽게도 이렇게 한 끼가 7,000원. 반찬 가짓수 어떡하지, 10개가 넘는 반찬이 어떻게 된 게 빠짐없이 죄다 맛있다. 물론 메인메뉴 순두부 전골도 엄청 푸짐하고 맛있었다. 저게 어떻게 1인분인지, 저게 어떻게 7,000원인지. 반찬도 반찬인데, 쌀밥은 또 어떡하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갓 지은 밥에서는 꿀맛이 났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다음날 또 들렀는데 역시 밥이 일품이다(청국장은 그냥 그랬다). 여긴 ‘밥’ 맛 집으로 인정. 그냥 골목을 걷다 들어간 허름한 식당에서 대박을 외치다.
낯선 동네에 다시 걷고 싶은 길이 생기고, 다시 가고 싶은 카페가 생기고, 또 들르고 싶은 밥집이 생기다니. 설레는 일이다. 낯선 초당동을, 마치 아는 동네 걷듯 슬슬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