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찬 둥지

결혼하고 떠나더니 아이 낳고 돌아왔네

by 오늘의온도

우리 집은 세 자매로 딸 부잣집이다.

나는 태어나보니 둘째였고 언니와 여동생 사이에서 북적북적하게 자랐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언니는 결혼해서 과천으로 나도 결혼해서 서울로 떠나고 집에는 엄마, 아빠 그리고 터울 있는 막내만 남게 되었다. 딸이 둘이나 결혼해서 엄마가 외롭지는 않을까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엄마는 터울 있는 막내까지 키우느라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이제야 뒤늦게 즐기느라 바쁘셨다.


엄마는 예전부터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못 봐준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아기도 없던 우리는 ‘엄마가 봐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하고 엄마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언니가 아이를 임신했고, 나도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아이를 임신했다. 결혼도 일 년 차이로 했는데, 아이도 일 년 터울이 되었다. 언니도 나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다행히 육아휴직을 일 년씩은 쓸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언니의 복직 날이 다가왔다. 언니의 시어머니는 일을 하셔서 아이를 봐주실 수 없다고 했고, 언니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세 딸을 키우느라 이제야 자유가 생긴 엄마도 아이를 봐주기 힘들다고 했다. 언니는 일단 엄마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아이를 봐줄 사람을 구하더라도 친정집 근처가 안심이 된다고. 그렇게 언니의 복직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고, 첫째 딸의 눈물을 지나칠 수 없었던 엄마는 결국 손녀를 맡아서 봐주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원은 친정집 근처로 잡았다. 산후조리원에서의 2주가 끝나고, 엄마 집에서 지내며 아이를 돌봤다. 처음에는 분명 머지않아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서울 집으로 돌아가서 외롭게(?) 아기를 키울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여기는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동생도 있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남편과 이야기를 하니 남편도 엄마 집 근처로 이사를 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도 안돼서 엄마 집 근처, 언니 집 옆 동으로 이사를 왔다.



자유를 꿈꿨던 엄마는 아주 짧은 자유를 마치고, 다시 꽉 찬 둥지를 맞이했다. 그 전보다 더 북적이는 둥지. 처음에는 정말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 언니도 나도 풀타임으로 일하고 직장도 멀어 새벽같이 나가서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엄마가 오래간만에 약속이라도 있는 날이면 아이 보는 일을 맡아야 했던 막내도 화가 많이 났다. 모두가 힘들었던 2-3년의 시간이 지나고, 언니도 프리랜서로 나도 집에서 가깝고 짧게 일하는 곳으로 이직하면서 모두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물론 아직도 엄마는 쉽지 않은 내 딸을 아침에 유치원에 보내주시고, 언니가 가끔 일하러 가는 날에 언니의 두 딸을 봐주시곤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엄마 집에서 저녁을 먹기도 한다. 그래도 엄마의 취미생활과 모임을 유지할 수 있는 지금 정도의 상황이 오기까지 힘들었기에 우리는 현재에 감사한다.


이제 막내 동생이 결혼할 나이가 다가오고 있다. 막내는 자기는 아이를 안 낳을 거라고 말하긴 하지만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것. 엄마는 강력하게 선전 포고했다.


“막내가 애 낳으면 너희들이 도와줘! 나는 더 이상 못한다!”


어느 날 동생이 아기를 낳는 날이 오면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언니랑 나랑 열심히 도와줘야겠다. 그간 우리 아이들 돌보느라 고생한 엄마가 앞으로 엄마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또 종종 우리 아이들을 돌보느라 자기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동생의 분노의 나날에 대한 보상으로. 그래도 이렇게 꽉 찬 둥지로 북적북적 함께 아이들을 키울 수 있어서 감사한 오늘이다.



*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