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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평화 Nov 01. 2023

12. 솔직히 제사보다 즐거운 여행!

     친정아버지의 특별한 훈육과 유언

나의 친정은 딸만 일곱이다.

코로나 여파로 잘 만나지 못하다가 아버지의 기일 덕분에 자매들이 오랜만에 모이게 되었다. 나는 만날 생각을 하니까 어렸을 적 소풍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시곗바늘은 너무 천천히 움직였다.


누군가는 불효자라고 할지 몰라도 제사보다 여행인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도 본인 기일 덕분에 딸들이 즐거워한다면 잘했다고 생각할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낭만아빠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오니까 아버지가 춤 스승과 함께 학춤을 추고 있었다. 노래와 유머도 잘하였다. 특별히 자녀에 대한 훈육이 별나고 독특했다.  


나는 두 살 터울인 언니하고 잘 싸웠다. 아버지는 언니 하고 싸우면 나와 언니의 머리카락을 묶어놓는다. 저절로 머리는 붙어있게 되고 자연히 같이 움직이게 된다. 화장실 갈 때가 큰 문제였다. 빨리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머리카락도 원상복귀 시키고 자유롭기를 원했다. 울면서 용서를 구하는 우리 꼬락서니를 보고 아버지도 웃었다. “너희들은 같은 배에 탔으니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머리카락을 풀어주고 얼굴이랑 깨끗이 씻으라고 하였다.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고 어느 땐 철부지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였다. 


88세 아버지 생신에 딸과 사위, 손자, 손녀 모두 모여 즐겁게 잔치를 벌였다. 보고 싶은 친척들은 생신 일주일부터 만나기 시작하였다. 친척들은 거의 다 만났다.

생신 잔치 후 우리가 떠나려 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하룻밤 더 자고 가거라.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여기에 올 수도 있다.”

우리는 농담도 잘하신다며 그냥 흘려들었다. 다음날 새벽, 아버지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편안히 돌아가셨고 지방에 사는 언니들은 부랴부랴 다시 서울로 왔다.

나는 어머니가 하루 더 있다 가라 해서 아버지와 함께 밤을 지냈다.

아버지는 방이 너무 환하여 눈이 부시다며 자주 불을 끄라 하였다. 

“형님, 나 이제 가니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소리를 비몽사몽간에 들은 것도 같았다. 


오랜만에 모인 딸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과수원 길’을 불렀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활짝’ 할 때는 ‘활’을 짧게 불러주는 듯하다가 살짝 쉬고 ‘짝“을 붙인다.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생긋’ 할 때도 ‘생’에서 짧게 불러주며 잠시 쉬었다가 ‘긋’을 붙여준다. 

그래야 노래가 맛깔스럽고 재미가 있다.  

딸들 모두 아버지 장단을 다 알고 있어 아버지처럼 노래를 불렀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했는데 큰언니는 처음에는 흘러간 노래를 부르더니 마지막 곡으로  나훈아의 ‘테스 형’을 불렀다. 지그시 눈을 감고 가사를 음미하며 불렀다. 

눈을 감은 얼굴 위로 고단한 세월의 흔적과 운명의 장난을 인정하는 그림이 클로즈업되었다. 언니는 나한테 “그게 너의 운명이야.”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운명에 반항하고 싶었다.

나와 잘 싸웠던 바로 위 언니는 노래를 잘했다. 언니는 지금도 세 군데 합창단에 소프라노로 나가고 있다. 레퍼토리가 끝이 없었고 시간은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여섯째 딸이다. 나와 큰언니와의 나이차는 13살이 된다. 큰언니는 90세를 향하고 있다. 동생이 여섯이나 되니 때로는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기도 어려웠다. 
 80이 넘는 셋째 언니가 유치원에서 배운 ‘오뚝이’를 노래와 함께 춤을 추워 배꼽 쥐고 웃었다. 암기력이 좋은 언니는 초등학교부터 담임 선생님 이름을 쭉 꿰었다.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검은 눈은 성내어
 뒤룩거리고
 배는 불룩 내민 꼴
 우습구나야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술이 취해 얼굴이
 빨개 가지고
 비틀비틀하는 꼴
 우습구나야


1950년대의 어떤 아버지는 딸만 낳았다고 어머니를 구박하거나 딸들을 하찮게 여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친정아버지는 딸 일곱을 칠 공주라고 부르고, 혼낼 때는 매몰차게 혼내더라도 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었다.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본받아 집에서 키우는 개를 혼낼 때, 혼내는 이유를 개에게 먼저 말했으나 내 말을 알아듣고 개는 재빠르게 도망쳤다. 


큰언니는 부모자식 간에도 주고받고 해야지 공짜는 없다고 하였다. 

글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맞는 말도 아닌 거 같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하신 말씀을 생각한다.

“사람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밥은 먹고 산다. 그 위에 꿈을 꾸고 산다면 아무도 그 행복을 뺏어갈 수 없다.” 나는 이 말에 오늘도 도전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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