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과 라 트라비아타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이름이다. 오페라 첫 장면에서 그 유명한 ‘축배의 노래’가 나온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춘희’라는 이름으로 공연하였다.
‘백석 시인과 라 트라비아타’는 지난 10월에 ‘용인시문화재단’에서 주체한 콘서트의 부제목이다. 오페라로 시작하여 백석의 시로 끝나는 음악과 문학의 만남이었다.
오페라의 남자 주인공인 알프레드와 백석과 그들 연인들 이야기이다. 알프레드와 백석은 부잣집 도련님들이고 상대 여인들은 파리의 고급 매춘부와 수준 높은 기생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줄리아드 로버츠’가 나오는 ’귀여운 여인‘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동백꽃 필 무렵‘이 있다. 두 드라마 모두 ’해피 엔딩‘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백석과 그의 연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1912년 7월 태어나 1996년 1월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영어교사, 신문사 기자, 시인, 소설가, 번역문학가로 활동했다.
백석은 현재 국어교과서에 시가 가장 많이 실린 시인이다.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시인들의 시인’이다. 그가 낸 시집 ‘사슴’에는 33편의 시가 있었는데 독립선언문을 쓴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슴은 딱 100부 한정판으로 금방 동났다. 책을 구하지 못한 윤동주는 그의 시를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백석은 조만식의 러시아 통역비서로 일했고 해방직후 고향인 정주로 돌아간다. 월북 시인이라 하여 외면받았지만 그의 이념과 사상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사상이 덜 강요된 아동문학을 주로 썼다.
백석의 연인 본명은 김영한이고 기명은 진향이었고 백석과 살 때는 자야였다. 백석과 헤어진 후 37세의 이름은 김숙이었다. 이름으로 해석하자면 태어날 때는 김영한이고, 기생으로 활동할 때는 진향이었고, 백석과 함께 지낼 때는 자야였다. 백석과 헤어진 후 김숙이라는 이름으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경영했다. 요정은 고급술집을 말한다.
대원각을 경영하며 늦깎이 공부를 하여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동받아 전 재산을 길상사(사찰)에 위임했다. 대원각은 그 당시 가치가 1000억 원 대이었다. 기자는 물었다.
“어떻게 전 재산을 기부할 수 있었나요?”
“그 돈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지요.”
사회에서 지탄받는 요정이 숭고한 절로 바뀌어지는 것은 가장 잘 환원하는 것이며, 아이러니이다. 나는 이점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야만의 독특한 사회적 책임을 다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백석에 대한 지조도 끝까지 지켰다.
그가 쓴 책 “내 사랑 백석”이 있고, 백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가 만든 ‘백석 문학상’도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타샤(자야)를 기다리며 쓴 시이다. 백석은 자야에게 그녀의 처지에 대하여 자포하거나 자학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기생과 손님으로 만난 자야는 항상 미안해했고 결국은 백석을 놓아 보내 주었다. 백석이 만주에서 자야를 기다리는 사이 6.25가 터졌다.
자야는 1999년, 자신보다 3년 먼저 간 사랑하는 백석의 품으로 돌아갔다.
인생은 순간을 살지만, 백석의 작품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