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부부 성장기
친정어머니 생신 88세에 딸들과 손주들이 모였다. 자연히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머니가 해맑게 웃으면서 아버지의 심장수술 이야기를 꺼냈다. 심장수술하고 다음날 아침이었단다.
“여보, 어젯밤 하도 잠이 안 와서 내가 119로 전화했어.”
“그 사람들 바쁜데, 쓸데없이 뭐라 말했어요? 벌금 나올 텐데.”
“내가 오늘 심장수술을 했는데 긴장되어 잠도 안 와서 그러는데 잠자는 비법이 있냐고 물었지. 꼭 방법이 있을 거 같으니까 알려 달라 했어.”
“아이고, 나를 깨우지 그랬어요? 그랬더니 뭐라 하던가요?”
“불은 안 났냐고 물어보면서, 나이와 주소를 물어서 대답했지.”
“그래서요?”
“여자 상담사가 전화를 이어받더니 100부터 숫자를 거꾸로 세어보라고 하면서 잠을 유도하더라고. 유도에 속아 주어 잠을 잔 거 같은데, 혹시 꿈인지도 모르겠어.”
“제발 정신 차리세요, 여보.”
“114로 내가 전화했는지 물어볼까?”
“아니, 당신 핸드폰 보면 다 알게 되는데.”
“그렇지, 어라 전화를 했었네. 꿈이 아니었네.”
그렇게 너의 아버지는 철부지였단다. 그러자 나의 딸이 말했다.
“할머니, 우리 엄마도 철부지 엄마라니까요. 할아버지 닮았나 봐. 내가 복숭아 잘못 먹고 입술이 부풀어 오르니까 약을 발라줄 생각은 안 하고 너는 입술이 매력적이 되었다고 놀렸데요. 그대로 아파있으라고. 그래서 내가 엄마를 언니라고 부르는 거요. 언니 같은 엄마라고.”
“우리 손녀딸, 엄마 많이 놀리면 이 할머니가 섭섭해요.”
“어머니, 괜찮아요. 사실 내가 아들, 딸 차별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것도 내 잘못이지.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낳았으니, 아들 손이 귀해 그렇지. 그리고 사실 이모 중에서 엄마가 가장 늦게 아들을 가졌어. 아들을 못 낳았다면 친정 닮아 그랬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엄마도 힘들었을 게다.”
“딸만 낳은 게 엄마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건 엄마 말이 맞아요. 할머니, 나를 돈 많이 드는 악기를 시킨다고 고모들이 뭐라 했을 때도, 엄마는 다 물리치고 씩씩하게 자녀교육만큼은 상관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어. 또 삼촌은 개인지도까지 시켰어요. 입주 가정교사라고 집에서 먹고 자고 빨래도 해주었는데, 엄마가 다 했어요. 하숙 쳐 가면서 딸과 시동생을 가르쳤어.”
“시집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주는 밥만 홀라당 먹고 책 보고 직장만 다녔지. 시집가더니 지 할 일은 하는구나. 그래도 엄마한테 언니 같은 엄마라고는 하면 안 돼요.”
“어머니, 윤희가 실컷 말하게 놓아두세요. 다하고 나야 응어리가 사라져요. 윤희야, 괜찮으니까 속에 있는 말 더해도 돼.”
“글쎄, 스트레스도 다 풀리고 입도 아프니까 이쯤 해서 그만둘까 생각 중이네요.”
“아니 더 하세요. 우리 공주님!”
“엄마, 갑자기 엄마가 되고 보니까 실수도 많았어. 그런데 자식을 키워보니까 엄마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사실, 나도 엄마를 닮아 철부지 엄마야.”
“인생은 연습이 없잖아.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지도 못했는데.”
“그 대신 책을 많이 읽혔잖아. 나는 책에서 많이 배웠어. 실수도 하면서 배운 것도 많아. 나이가 드니까 상대방의 실수도 용납이 되더라고.”
“나이가 들면 서로 이해하고 생각도 부드러워지지. 분노와 욕심도 좀 사리지고.”
“엄마, 나는 김서방이 미워 죽겠어. 회사 갔다 와서 피곤하다고 아무것도 안 해. 그러면서 TV 리모컨만 계속 돌리고.”
“윤희야, 너무 미워하지 마라. 세월이 흐르면 미움도 사랑으로 변할 때가 온단다. 미워할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지. 울을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듯이.”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긴 한데, 좋은 날이 올지 모르겠어.”
“그래, 한번 물리를 터득해 봐. 물리는 사물의 이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