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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안한 제이드 Oct 27. 2022

내가 소위 '망한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얻은 것

능력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늘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덕질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엄마를 졸라 서울에 아이돌 콘서트를 보러 갔고, 고등학생~대학생 때는 프로게이머를 좋아해 경기를 보러 직접 경기장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덕질했던 대상은 늘 메이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나였기에 단 한 번도 마이너한 사람을 덕질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아이돌은 전 국민이 다 아는 H.O.T.였고, 열심히 경기를 챙겨봤던 프로게이머도 한국 전통놀이라 불리는 스타크래프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수였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하고 싶다) 

  내가 덕질하는 사람은 이미 그 업계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고, 내가 그들을 왜 좋아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레벨에 올라 있었다. 커뮤니티에 가 보면 소위 '홈마', '찍덕'들이 찍은 멋진 사진들이 흘러넘쳤고, 나 따위가 팬으로서 뭔가를 하지 않아도 수천수만의 팬들이 그를 응원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응원하고 방송을 챙겨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덕질을 해 왔다. 




  그러니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망돌', 즉 유명하지 않은 아이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마치 사고와도 같은 일이었다. 어쩌다 내가 그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도저히 말할 수 없기에 생략한다(그 또한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는 스토리이다). 여하튼 나는 100명에게 물어보면 99명은 누군지 모르는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간의 덕질에서는 겪지 못한 일들을 겪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꼈다.


  제일 결정적인 건, 팬의 수가 적어도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팬 활동을 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아이돌이었다. 그러니 '찍덕'도 거의 없었고, 스케줄이 있어도 그 스케줄에 따라가는 팬이 없을까 봐 나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스케줄 하나라도 있으면 종류별로 사진이 우르르 떠서 그걸 보면서 행복해하기만 하면 되는 이전까지의 덕질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라도 있으면 움짤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기에 내가 어떻게든 배워서 직접 만들어 저장해야 했다. 

  또 먼발치에서 스타를 스타로만 보고 싶어 하는 나였지만 팬미팅이라도 가면 너무 소극장에서 해서 아이돌과 눈 마주치는 건 기본, 때로는 전체 인원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줘서 아이돌과 대화를 나눠야 하기도 했다(난 이런 거 안 좋아한다). 아이돌과도, 다른 팬들과도 지나치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피곤했다.  


Photo by Austin Neill on Unsplash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돌을 좋아하며 다른 덕질할 때와 같이 너무 행복했다. 아이돌이 사운드클라우드에 직접 작곡한 노래를 올려줄 때마다 새벽에 반복 재생하며 신나 했고, 팬카페에서 팬들에게 써주는 다정한 말들을 읽으며 위로받았다. 팬미팅에서 작곡한 노래를 처음 불러주었을 때는 심장이 짜릿할 정도로 행복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나에게는 그 아이돌이 지상 최고의 아이돌이고 연예인이었다. 누구보다 좋은 노래를 부르고 작곡도 잘하고 예능도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애정을 가지고 찬찬히 들여다보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은 정말 어디 하나 부족한 데 없는 사람이었다. 거지 같은 소속사에 속해 있어서 이상한 스케줄을 받아도 늘 성실히 수행하고, 팬들에게 속상한 사건이 있는 날에는 먼저 팬카페에 찾아와 다정한 글을 남겨주고(심지어 글도 잘 썼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연습실에서 늦게까지 연습하고, 작곡도 작사도 꾸준히 해서 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은 아무도 잘 모르는 '망한 아이돌'이었다. 그리고 망한 아이돌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아이돌을 한창 좋아했을 때 프로듀스101과 같이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이 격하게 유행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람들은 망한 아이돌은 그간 열심히 살지 않아서 망한 거다, 성공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라는 말을 쉽게쉽게 했다. 아이돌이 성공하지 못한 것엔 다 이유가 있다며 아이돌의 외모, 노래, 춤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누구보다 내 아이돌을 열심히 챙겨봤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 제일 성공한 아이돌 대비해서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이 덜 열심히 한 것은 없었다. 팬들에게 불성실한(소위 팬서비스) 것도 아니었고, 소위 본업(노래, 춤)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인기 없는 걸 뭐라 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어도, 내 아이돌이 인기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며 능력을 지적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늘 불같이 화가 나 있는 팬이 되었다.



  

  늘 세상에 대해 화가 나 있던 내 팬질은 좋아했던 아이돌이 소속사와의 계약 종료로 활동을 멈추면서 끝났다. 그렇게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은 끝내 소위 '성공'하지 못하고 아이돌 생활을 마감했다. 하지만 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내 생애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망한 아이돌' 덕질을 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이 대외적으로 성공하고 실패하는 건 그 사람의 능력이 좌우하는 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성공한 사람을 동경하고, 실패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곤 한다. 성공엔 다 이유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실패에도 사유가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성공이든 실패든, 그 사람의 능력뿐 아니라 수많은 우연과 다른 환경적 요인에 의해 갈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진리이지만, 내 삶에 대입하면 그게 영 쉽지 않았었다. 성공한 사람의 삶의 방식은 그게 옳든 그르든 따라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았으며, 실패한 사람에게서 나와 비슷한 점을 찾으면 괴롭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이 대중적으로는 '실패'했을지라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실력 있는 아이돌이라는 걸 팬인 나는 알았던 것처럼, 각각의 사람도 '실패'했든 '성공'했든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왔고, 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덕분에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을 절대 결과물로만 평가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어떤 유명 아이돌을 좋아해도 얻을 수 없었던 귀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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