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안한 제이드 Nov 15. 2022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나간다는 것.



  스타크래프트가 국민게임이었던 시절, 나는 스타는 잘할 줄 모르면서도 스타 프로게이머의 팬이었다. 그때 내가 팬이 되기로 선택했던 선수는 당시 이미 '올드 게이머(지금 생각해보면 호칭이 참 재미나다)'라 불리는, 소위 전성기가 살짝 지나간 게이머였다. '올드 게이머'는 엄청난 전성기를 보냈기에 유명하지만, 지금은 전성기 때보다 잘하지 못하기에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게이머는 경력이 화려했지만 우승을 한 번도 못했었기에, 그에 대한 조롱과 놀림이 더 심했다. 소위 '슬럼프'라는 걸 겪는 것도 팬으로서 같이 겪었다. 연패가 이어지고, 선수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사라지고.. 그런 과정을 팬인 나도 함께 겪어야 했다.


  몇 번이나 생각했다. 나는 왜 업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우승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 또는 지금 막 떠오르고 있는 선수를 좋아하지 않고 과거에 제일 잘했던, '올드 게이머'를 좋아해서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좋아하는 게이머를 바꿔볼까?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건 복잡한 거라, 나는 끝내 그 게이머를 은퇴할 때까지 응원했다. 물론 그 사이에 환희와 같은 승리의 순간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패배의 경험도 수도 없이 경험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나는 다시는 프로게이머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경기 한 경기를 겪어낼 때마다 선수뿐만 아니라 팬이 견뎌내야 하는 감정적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년이 흘러, 다시는 프로게이머를 좋아하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던 나는 룰도 제대로 모르는 리그오브레전드 리그의 플레이오프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또 어떤 선수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그 선수 또한 경력이 꽤 긴 편인, 이미 전성기라 불렸던 나이는 지나간 선수였다. 관심이 가서 그 선수의 경기를 챙겨보면서도 내 안의 내가 계속 소리쳤다. '너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될 거야, 이미 유명하지만 전성기가 지난 선수를 응원하면 어떤 걸 겪는지 다 해봤잖아, 왜 또 그 과정을 겪으려는 거야?'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나는 또 그 선수를 응원하게 되었다. 내가 응원하게 된 선수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좋은 실력을 보였지만, 계속해서 주변으로부터 '그래도 예전만 못 하다, 앞으로 우승은 못 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다 2022년 가을, 마법처럼 롤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Photo by Giorgio Trovato on Unsplash



  이번 롤드컵에서 제일 화제가 된 문구는 역시나 '꺾이지 않는 마음'일 것이다ㅎ 이제는 너무 많이 쓰여서 밈처럼 되어 버린 듯한데(ㅎㅎ) 이 문구는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직접 한 말은 아니었고, 어려운 승리 후 가졌던 인터뷰를 정리한 기자가 처음 쓴 말이었으나 우승 후 선수가 다시 언급하며 최고의 화제성을 기록했다. 나는 이 문구를 보고 내가 그간 왜 계속 소위 '올드 게이머'를 응원해 왔는지를 깨달았다. 이미 최고점을 지나 이제는 내려올 일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계속 노력하고 치열하게 싸우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던 것이다.


  내가 응원했던 선수가 이번 시즌에 들었던 말들은 잔인했다. 조금만 실수하거나 한 번이라도 잘못된 판단을 하면 '은퇴해라'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가장 슬펐던 것은, 나조차 이번 시즌은 성적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응원하자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응원하는 사람조차 그런 안이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모든 팬이 그런 건 아니고 나만 그랬을 것이다), 선수는 승리에 대한 마음을 꺾지 않았다. 매 순간 진심으로 경기에 임했다. 롤드컵 우승팀 원딜은 나이가 몇 살 이하라는 징크스가 있다더라, 같은 얘기가 들려오고 모두가 솔직히 이번에 우승은 힘들지,라고 생각할 때도 선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소년만화 같이, 그 누구보다 멋지게, 모든 징크스를 깨고 우승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결과를 확인하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반성의 마음이 들며 나 스스로를 돌아봤다. 나는 내 삶에서 얼마나 꺾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이미 이러저러한 삶을 살기엔 늦었어, 하고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현실이 녹록지 않아도, 이제는 다 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고 나를 표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게이머의 우승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래, 역시 글을 쓰자. 누가 알겠는가? 나도 꺾이지 않고 계속계속 해 나가면, 어느 날인가 마법처럼 달콤한 열매를 맛보게 될지.


  



이전 16화 공공기관 다니면서 몰래 덕질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