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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다니면서 몰래 덕질합니다

왜 몰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수적이고 직원 평균연령이 4n살이 넘어가는 공공기관에 다닌 지도 10년이 넘었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비뚤어진 성격인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으나, 나 특유의 과도한 성실함과 인정욕구가 꾸역꾸역 지난 10여 년을 살아가게 했던 것 같다. 누구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지까지 알 것 같은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에 다니면서 나는 점점 내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회사 사람들에게 하지 않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절대 회사 사람들에게 들키기 싫어했던 사생활은 단연 '덕질'이었다. 


  요즘은 덕질의 시대라고들 한다. 음지의 취미였던(?) 덕질이 예전에 비하면 완전히 메이저의 자리에 올라왔다. 포토카드 바인더를 다이소에서 구매할 수 있고, 아이돌 생일 팝업스토어가 팝업의 메카 성수에서 열린다. 많은 덕후들이 자신의 덕질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실 책상에 자신이 덕질하는 대상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꾸며놓고 힘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게, 나는 내가 현재 덕질하고 있는 대상을 절대 오픈하지 않는다. 왜일까?


  일단은 쑥스럽다. 평소 회사에서의 나를 이모티콘으로 표현한다면 (-_-)에 가까울 것이다. 예의는 있되 쉽게 웃지는 말자.. 는 마인드로 일하고 있다(그게 실제로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덕질을 하고 있을 때의 나는 이모티콘으로 (+ㅁ+)에 가깝다ㅎㅎ 기본적으로 히히 웃고 있으며,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다면(대형 떡밥이라도 떨어질 때면) 그야말로 꺅 소리를 지르며 행복에 겨워한다.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면 (>ㅁ<) 정도일까?ㅎㅎ 그러다 보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회사에서 행복함 뿜뿜 하는 덕후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쩐지 부끄럽고 내키지가 않는다. 나의 조용한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도 덕질은 잘 숨겨두는 것이 여러모로 이롭다.  


  또한, 나에 대해 회사에서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그 어떤 말이 나오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회사다.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평균치에서 벗어나는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은 쉽게 화제에 오른다. 옆팀 차장님네 둘째가 무슨 대학교에 들어가서 남자친구를 사귀는지 마는지까지 알 수 있는 회사에서 내가 덕질하고 있는 대상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다. 그 덕질대상이 뉴스에 오르내릴 때마다 'ㅇㅇ씨가 좋아하는 걔가 어제~'라는 말을 백 번쯤 듣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정말 싫다!


사진: UnsplashKristina Flour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후의 DNA를 타고난 사람으로서(지난 글 참조) 나는 '공공기관에 다니는 나'로서의 자아도 지켜야 하는 한편 '덕후로서의 나'의 자아도 잘 꾸려나가야 했다. 그래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하고 있는 덕질은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 아이돌을 미친 듯이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그 아이돌은 꽤나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회사에서 덕질하고 있음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끝의 끝까지, 덕질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려 노력했다. 현재 인기 있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을 들키면 소문이 다음날 회사 끝까지 퍼질 테니까! '그 아이돌 저도 좋아하는 편이에요 방송 좀 챙겨보고.. 호호' 하고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밤마다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미친 듯이 덕질하고 모든 투표에 목숨 걸고 참여하고 있었음을 이 자리에서나마 밝혀 본다.


  둘째, 대신 지나간 덕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모든 덕질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점심시간에 스몰토크할 소재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하는 일의 80%는 덕질인 나에게 '주말에 뭐 했어?'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예전의 덕질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는 내려놓고 하는 편이다. 물론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니 예전 일이랍시고 '아 그때 저 그 가수 좋아해서 막 고척돔 콘서트도 가고 그랬는데' 하고 얘기했다가 '어? ㅇㅇ씨 그때도 나랑 같은 팀이었는데, 그때 그 가수를 그렇게 좋아했었나?' 하고 역질문을 받아서 진땀을 흘린 적도 있긴 했다^^;;(이게 다 회사를 오래 다녀서 그렇다)


  셋째, 다른 덕후들을 절대 비난하지 않는다. 용감히 회사에서 자신의 덕질을 드러낸 덕후 사원들은 미래의 내 지원군(?)이다. 혹시나 나의 현재 덕질이 어떤 잘못된 일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을 경우, 덕후로서의 나를 그나마 인정해 주고 지켜줄 몇 안 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덕질 취향이 나와 안 맞더라도(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이더라도) 그들의 덕질을 매우 적극적으로 응원한다. 그들이 먼 훗날 나의 원군이 되어주길 바라며..(아련)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이나 '공공기관 다니는 사람으로서의 나'와 '덕후로서의 나'의 자아가 충돌하여 힘들었다. '공공기관 다니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지키려면 사실 이런 글을 쓰면 안 된다. 혹~시나 이 브런치를 회사 사람들에게 들킬 수도 있으니까!(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또한 당연히 회사에는 비밀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미 브런치에는 들키면 큰일 날 글들을 잔뜩 써버리기도 했고, 덕질에 대한 이야기도 아예 브런치북으로 내기까지 했으니.. 이미 그른 것 같다. 들키면 뭐.. 어쩔 수 없지 하는 안이한 마인드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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