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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안한 제이드 Sep 06. 2023

덕후의 DNA를 타고난 자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덕후가 아닌 친구는 늘 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너는 어디서 그렇게 자꾸만 사랑하는 것들을 발견하는 거야? 그리고 어쩜 그렇게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거야?' 그 친구는 살면서 그렇게 푹 빠져서 뭔가를 덕질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가 한편으로는 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덕후의 DNA를 타고난 사람이 '머글(소설 해리포터에서 마법을 모르는 일반인을 일컫는 말)'을 바라볼 때의 복잡한 소회 같은 것일 테다.


  그렇다. 나는 태어나길 '덕후'로 태어났다.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기도 전인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 누군가의 '팬'으로 스스로를 지칭했다. 뭔가를 좋아하면 불같이 타올랐다. 아이돌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팬카페에 가입하고 모든 굿즈를 사고 멤버들의 정보를 달달 외웠다. 드라마를 좋아하면 한 컷 한 컷을 나노 단위로 앓았고 블루레이 추진 카페에 가입했고 기어코 블루레이를 손에 넣었다. 20대 초반까지는 모두가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끝의 끝까지 파고들어 손안에 관련된 모든 것을 쥐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덕후가 아닌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이 뭔가를 '좋아하는' 방식은 나와 꽤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는 아이돌에 관심이 생기면 앨범을 한 장 사고, 노래를 즐겨 듣는 수준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가 없는 건 아니지만 끝나면 미련 없이 다른 콘텐츠로 갈아탔다. 애초에 뭔가에 푹 빠져서 딥(deep)하게 파지를 않았다. 나로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덕후가 아닌 친구들은 덕후로 사는 나를 부러워하곤 했다. 뭔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그 사랑에서 일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나도 뭔가를 그렇게 좋아해 보고 싶은데 그게 안 돼'라며 안타까워한 친구도 있었다. 덕후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반대로 덕후가 아닌 삶을 살고 싶을 때도 있다. 오잉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싶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덕후로 사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사실 덕질이라는 행위는 고통을 수반한다. 가볍게 좋아하면 딱 긍정적인 에너지만 얻고 스트레스까지는 안 받을 것을, 그 단계를 넘어서 덕질대상에 지나치게 과몰입해 고통과 마음의 상처까지 같이 받는다. 덕질대상의 알고 싶지 않았던 다소 지질한 모습까지 알기 싫어도 알게 되기도 한다(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니까). 


  입덕할 때의 달콤한 설렘은 잠시뿐, 그 이후에는 즐거움과 함께 불안과 괴로움을 친구처럼 끼고 가야 하는 것이 덕질이다. 사실 나는 매번 새로운 대상을 덕질할 때마다, 다시는 이 분야의 덕질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ex 아이돌을 덕질하면 다시는 아이돌 덕질은 안 한다 다짐하는 식) 그 판(그 시장, 시스템)의 더러운 점을 너무 잘 알게 되었는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감정을 저당 잡혀 사는 것 같은 그 기분이 참 별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또 누군가의/무언가의 덕질을 하고 있었다. 왜일까?


사진: UnsplashJemma Pollari



  어쩔 수가 없다. 제목 그대로, 나는 덕후의 DNA를 타고났다. 뭔가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 대상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알면 알수록 사랑하고 싶어지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앞으로를 응원하게 된다. 이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지므로 내 의지로 멈출 수가 없다. 연예인을 덕질하면 그 연예인의 SNS를 탐독하고, 트위터에 덕계(덕질만 하기 위한 계정)를 만들어 덕질대상을 찬양하는 글을 써 댄다. 드라마를 덕질하면 드라마 관련 굿즈를 싹쓸이하고 블루레이를 사서 좋아하는 장면을 달달 외울 때까지 돌려 본다. 그게 나의 '무언가를 좋아하는' 방법이다. 덕질은 패키지 상품과 같아서 즐거움과 함께 괴로움도 겪어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 태어나 버린걸. 


  덕질은 돌려받을 수 없는 외사랑을 하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돌려받을 생각을 안 하고 쏟아붓는 사랑이기에 더욱 매력적이기도 하다. 오직 좋아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응원하기 때문에 애틋한 마음으로 덕질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다. 썩은 표정으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가도 덕질대상이 인스타에 게시물을 올렸다는 알림이 뜨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지어지는, 그런 게 덕질의 본질인 것 같다. 어찌 되었든 간에, 덕질은 지난한 일상을 구원해 준다. 지루하고 우울한 일상을 스펙터클한 판타지 세계로 만들어준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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