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에서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 얻기
내 이전 글('내가 회사에서 쓸모없는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서도 썼듯이, 나는 최근 완벽한 무기력증 상태에 빠져 있다. 글을 쓰는 것조차 힘겨워서 브런치에서도 살짝 이탈할 정도로. 병원에서 추천해 준 검사를 해봤더니 에너지 지수(같은 것)가 정상범위의 반도 안 되더라. 의사 선생님이 지금 너무 지치고 힘이 없는 상태일 거라고 하셨다. 어쩐지 최근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회사에 나가는 기본적인 일조차 버거워서 꾸역꾸역 억지로 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진취적으로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일상을 버텨나간다는 느낌으로 살고 있다.
그런 내가 요즘 유일하게 웃음을 찾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덕질하는 시간이다. 최근 우연히 접하게 된 한 드라마와 그 드라마의 출연 배우들을 덕질하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다. 새로운 소식 하나 뜰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면서 클릭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도 황당할 지경이다.
여기서 잠깐, '덕질'이라는 단어를 쓸까 아니면 다른 대체어(?)를 써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일단 '덕'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데다, '~질'이라는 말 자체가 행위를 약간 얕잡아보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니 부정적으로 느껴질까 싶어서이다. 하지만 국어사전에서도 이제 '덕질'을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로 정의하고 있으니, 나도 일단은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해서 하는 모든 행위를 '덕질'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회사도 겨우겨우 나가고, 집에 가면 쓰러져서 자기 바쁜 내가 덕질이라니. 즐거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현실에서 도망쳐 덕질로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현실에서 쓸 에너지도 없으면서 그 적은 에너지를 덕질에 쓰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퇴근한 이후에는 에너지가 없어 브런치에 글도 쓰지 못하고 유튜브에 영상도 올리지 못하면서 덕질이라니.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마저 느껴졌다. 상담에 가서 이런 부분을 이야기했더니, 선생님이 아주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 주셨다.
"아니, 힘든데 회피 좀 하면 어때요? 평생 회피하는 것도 아니고. 덕질하면서 힘도 좀 얻고 하는 거지. 이번 달은 쉬는 달로 생각하고 마음껏 회피하세요."
그렇다! 내 완벽주의에 자기에게 엄격한 성격이 나를 또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에너지가 없고 힘들 때는 좀 쉬어도 되건만.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덕질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좀 보내면 어떤가? 중요한 건 내가 덕질할 때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지쳐 에너지가 바닥이 된 상태에서 덕질로라도 에너지를 얻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달은 행복하게 덕질이나 하며 지내기로 했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나답게, 그 무엇에든 쉽게 입덕(덕질을 시작하는 것) 하지 않는 편이다. '음 그냥 좀 좋을 뿐이지 팬이 될 정도는 아니야. 딱 이 정도로만 좋아해야지' 하는 기간이 꽤 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질의 시작은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아서, 한번 좋아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가 없다. 푹 빠져서 덕질대상에 관련된 모든 정보와 영상들을 찾아 헤매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가 '입덕'의 단계에 들어섰음을 인정한다.
이 단계에서 바로 입덕으로 넘어갈까? 아니다. 입덕을 인정하는 순간 재미있게도 나는 내가 덕질을 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순간들을 상상하고, 끝내 내가 탈덕(덕질을 그만두는)하는 순간까지 그려 본다. 덕질하는 대상(일반적으론 사람)이 와장창 실망스러운 발언을 할 수도 있겠고, 심하게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겠지?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 덕질대상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아주 먼 옛날 덕질대상이 범죄를 저질러 탈덕한 경험이 있어서 그만^^) 그런 가능성까지 다 고려하고라도 덕질을 할 만큼 내가 이 대상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가? 그게 나의 입덕을 결정하는 데 몹시 중요하게 작용한다. 나중에 좋아했던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지금 나에게 주는 행복과 에너지가 큰가? 이 질문에 마음속으로 'YES'가 나오면, 그제야 나는 그 대상에 입덕한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대상(대부분 사람)을 덕질해 왔다. 아이돌부터 배우, 프로게이머, 운동선수까지.. 분야도 성격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첫 번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잘' 한다는 것. 나에게는 생각보다 이게 중요했다. 가수면 노래, 배우면 연기에 재능이 있는 반짝반짝한 사람을 좋아했다. 반드시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내가 느끼기에 실력이 있고 잘한다고 생각할 정도면 충분했다. 본업을 잘하는 것에 더해 자기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더욱 좋았다. 대충, 또는 억지로(?) 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 이건 아마 내가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덕질에도 그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팬)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았다. 의외로 연예인/운동선수 중에 팬에게 사랑받는 것을 어색해하거나 싫어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내 덕질 대상에서 제외한다. 내가 덕질했던 사람들은 덤덤히 '나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좋다'라고 생각하는 타입이거나, '사랑받는 거 너무 좋아 팬들 너무 좋아' 분위기를 뿜뿜 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면, 내가 좋아하고 그걸 표현하는(소심한 팬인 나는 주로 글로 표현한다) 것이 저 사람에게 힘이 되겠구나 싶어 뿌듯하고 보람차기까지 하다. 그런 덕질이 하기에도 더 재미있다.
여기에 더해 원래는 세 번째 조건이 있었다. 자기만의 커리어를 어느 정도 쌓은 사람일 것. 가수든 배우든 운동선수든 신인을 좋아해 본 적은 없었다. 배우면 필모가 이미 어느 정도 쌓인 사람을, 가수면 이미 앨범을 어느 정도 내본 사람을 좋아했다. 운동선수나 프로게이머는 소위 베테랑 단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주로 좋아했다. 아마 입덕하기 전에 고민도 많이 하고 그 사람의 이전 활동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내 성격 때문이겠지.
그런데 요즘 하는 덕질이 이 조건에서 벗어났다. 어쩌다 보니(?) 이전 작품이 거의 없는 신인 배우들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 그런데 또 신인을 좋아하니 지금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덕질을 할 수 있어서 그게 그렇게나 신기하다. 사회초년생만이 가질 수 있는 의욕 뿜뿜한 모습을 보며 신입사원 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팬이 생기는 걸 신기해하고 그만큼 고마워하는 그들을 보며 너무 귀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덕질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경험하며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앞으로는 덕질 대상을 정할 때 너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마저 할 정도로.
두서없는 글이었지만 정리하자면, 나는 요새 기존에 하던 성격의 덕질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덕질을 하고 있고, 그 덕질로 내 일상에서 도망쳐 열심히 회피하고 있는 중이다. 이 회피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나도 모르겠다. 일상은 여전히 지난하고, 덕질에서 오는 행복은 유한하다는 것을 나는 지난 덕질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힘든 일상을 덕질의 힘으로 버텨내는 중이다. 상담 선생님 말씀대로 이번 달은 술렁술렁 살면서 열심히 덕질이나 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그야말로 갓생을 살고 있는 내 요즘 덕질대상들처럼, 나도 일상을 살아낼 에너지가 생겨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