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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안한 제이드 Jun 29. 2023

가볍게 오래오래 좋아할 수 있는 덕질

나의 덕질 연대기 - 배우 편


나의 덕질 연대기 - 배우 편




1. 혼자 영화제에 가다 : 배우 A


  때는 200n년, 대학생이었던 나는 인생 최대의 우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당시 나는 휴학생이었고, 멀쩡한 생활은 커녕 집앞 편의점에 나가는 것도 힘들어했었다. 그때 A 배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물론 A 배우는 소위 '톱스타' 배우로, 그 전부터도 알고 있긴 했었다. 다만, 특정 감독의 특정 영화를 통해 단순히 '아는' 배우를 넘어 '좋아하는' 배우가 된 것이었다. 


  A 배우를 덕질하게 된 나는 관련된 모든 정보를 뒤졌고, A 배우가 출연한 단편영화가 조만간 어느 영화제에서 공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영화제는 이화여대 캠퍼스 안에 있는 아트하우스 모모(지금도 이름이 기억남)라는 영화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무슨 용기가 났던 것일까, 집 앞에도 나가기 힘들어했던 나는 영화제 표를 예매하고 혼자 그 영화를 보러 이화여대에 갔다. 지금도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영화관까지 걸어들어가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햇살이 눈부셨고 이대 학생들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때 나는 내가 우울의 늪에서 한 단계 벗어났음을 느꼈다. 좋아하는 배우의 새로운 작품을 보겠다는 의지가 나를 지하에서 땅 위로 기어올라오게 만든 것이다.


  그날 이후로 혼자서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전처럼 어렵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 배우의 출연 영화(내 최애)가 재개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주 국제영화제에 혼자 다녀오기도 했다. 부적응 대학생이었던 나는 A 배우의 덕질을 하면서 혼자 무언가를 하는 법을 배웠고, 덕분에 복학한 후에 학교에서 혼자 다녀야 할 때도 당당하게 버틸 수 있었다. 지금도 A 배우를 떠올리면 대학생 때가 생각나면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좋아하는 마음이 우울의 덫에 걸려 있었던 나를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해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2. 내가 대상 배우의 팬이라니? : 배우 B


  B 배우는 201n년 푹 빠졌던 모 드라마를 통해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B 배우도 이미 꽤나 유명한 배우였기에 이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특정 드라마를 통해 완전히 푹 빠져버린 것이었다. B 배우는 자칫 잘못하면 보기에 민망해지기 딱 좋은 장면들을 오직 연기로 설득해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런 그에게서 일종의 장인정신까지 느껴졌다. 드라마가 끝난 후 B 배우의 인터뷰를 보면서 연기에 대한 그의 진중한 태도에 더욱 호감이 갔고, 결국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거슬러 따라올라가며 출연작을 하나하나 챙겨 보게 되었다. 


  이후 그가 나오는 영화는 꼭 영화관에 가서 챙겨봤고, 드라마는 아무리 취향이 아니어도 1화는 끝까지 보는 정성을 들였다(?). 그렇다. 나에게 배우 덕질이란 이런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애정하는 배우가 나와도, 취향이 아닌 드라마를 끝까지 부여잡고 보지는 못했다. 초반은 열심히 챙겨보되, 취향이 아니면 그냥 놓아주고(?) 관련 기사들만 좀 찾아보곤 했다. 다행히 B 배우는 작품을 꾸준히 하고 잘 고르는 편이라, 덕질을 시작한 이후 챙겨봤던 드라마 중 끝까지 시청을 완료한 드라마도 꽤 많았다. 연기력도 더욱 인정받아, 그 중 한 드라마로는 모 방송사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B 배우는 내가 하는 배우 덕질의 기준 같은 것을 세워준 사람이라 생각한다. 배우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이전 필모를 훑고 인터뷰를 탐독한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나올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사실 그것만으로 배우 덕질은 충분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다. 아이돌을 덕질할 때처럼 '노동'해가며 투표를 할 필요도, 팬으로서의 나를 증명해내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모두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은 일명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였기에 어디 가서 욕먹는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점들이 나를 마음 편하게 덕질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 같다. 



3. 신인 배우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 배우 C


  B 배우 이후로 배우 덕질을 또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덕질의 시작은 갑작스러워서, 이번에도 모 드라마를 보다 결국 그 드라마의 주연 배우를 덕질하게 되었다. C 배우의 덕질은 여러모로 정말 신선했다. 일단 A, B 배우를 거치며 만들어온 나만의 배우 덕질 기준을 지킬 수가 없었다. 모름지기(?) 배우 덕질을 시작하면 그 배우의 필모그래피부터 훑어야 하는데, 그게 마땅히 없었다! 너무 신인이라 이전 출연작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인터뷰조차 몇 개 없었다. 덕심은 산처럼 커졌는데 뒤적일 과거 자료가 없다는 게 나에겐 너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대신 신인 배우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있었다. 이전에 좋아했던 배우 A, B에게서는 이미 자리잡은 베테랑의 안정적인 퍼포먼스가 느껴졌다면, C 배우에게서는 조금은 불안정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나가는 성장의 기운이 와 닿았다. 배우에게서도, 팬인 나에게서도 앞으로 이 배우가 맡을 수많은 배역, 캐릭터에 대한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와 설레는 마음 자체가 덕질에, 그리고 내 삶에 에너지를 주었다. 그렇게 C 배우에 대한 덕질은 나에게 현생(현실생활)을 살아갈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현재진행형 덕질로 이어지고 있다. 


사진: UnsplashRachel Walker




가볍게 오래오래 좋아할 수 있어요


  배우 덕질을 할 때 가장 좋은 점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팬으로서의 내가 뭘 할 필요가 딱히 없다는 것이다. 아이돌을 좋아할 때처럼 온갖 사이트에 가입해서 투표하지 않아도 되며 음원 스트리밍을 수백 수천 번 돌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배우가 나오는 작품을 열심히 보고 열심히 좋아하면 된다. 그게 전부다.(물론 배우마다 덕질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 알고 있다. 몇몇 배우의 경우 아이돌처럼 노동하면서 좋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도. 다만 내 경우에는 이러하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히 덕질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한 배우는 정말 특수한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그냥 쭉 좋아한다. 새로운 작품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면 신나고, 작품이 공개되면 열심히 가서 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덕질 생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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