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덕질 연대기 - 아이돌 편
내가 언제부터 '덕질'이란 걸 시작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나가다 보면, 시간은 거꾸로 흘러 흘러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다. 초등학생 때 나는 당시 초절정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아이돌 그룹 A의 K모 멤버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K모 멤버는 당시 20대 초반으로, 나보다 무려 열 살 정도 많았으니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보기에 그는 너무나 멋있고 다 큰 '어른' '오빠'였다(지금 생각하면 귀엽기 그지없음). '오빠'가 하는 말이면 뭐든 믿었으며, '오빠'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비디오테이프로 녹화 떠놓고 보고 또 봤다(옛날이여..). 처음으로 덕질이란 걸 시작했으니 두려움도 없었고 거리낄 것도 없이 그야말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 같다. '오빠'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몇 달 전부터 부모님을 졸라서, 서울까지 올라가 잠실 주경기장 3층 구석에서 'A그룹 포에버'를 외치기까지 했었다ㅎ
그렇게 나름 화려했던(?) 내 인생 첫 덕질은 내가 직접 갔던 콘서트 직후 벌어진 A그룹의 해체로 인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콘서트에서 분명히 '오빠'는 이 그룹이 영원할 거라고 말했었는데! 그 후 벌어진 여러 가지 일에 어린 덕후는 상처받고 말았다. 다시는 아이돌을 좋아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 이후 긴 세월을 다른 분야의 덕질을 하며 지냈다. 이대로 아이돌 덕질은 영원히 안 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몇 년 전, '그 프로그램'을 보고 말았다. 수많은 국민 프로듀서를 만들어낸 그 프로그램. 우연히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한 연습생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절박해 보이는 표정, 실력에 비해 모자란 투표수. 그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저 연습생을 구해 주고 싶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열성적으로 투표에 임했고, 이후 데뷔에 성공한 그 연습생이 속한 B그룹의 콘서트와 팬미팅 등등에 열심히 티켓팅해서 따라다니며 덕질했다.
어떤 기사에서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서사를 가지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할 것 같게 편집한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또한 그 서사에 속아 버렸던 것 같다. 물론 돌이켜봤을 때 당시 내가 응원하고 구해주려 했던(?) 연습생이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은 맞았다. 그러나 내가 투표로 그를 '구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같잖은 생각이었는지, 이후에 다른 많은 아이돌들을 덕질하며 알게 되었다. 아이돌 개개인의 삶과 서사라는 건 절대 단순하지 않은데,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방송의 재미를 위해 모든 서사를 너무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이건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고, 당시에는 그 누구보다도 내 아이돌을 서바이벌 지옥에서 구해내 찬란한 성공을 맛보게 해 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고백한다. 지금은 돌이켜 생각만 해도 기가 빨리는 듯한 경험이었지만, 어쨌든 재미있긴 했다.
그다음으로 좋아했던 아이돌 C는 예전에 브런치 글(내가 소위 '망한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얻은 것)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바로 그 유명하지 않은 아이돌이었다. 이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흔히 팬들이 말하는 '노동'을 정말 정말 많이 해봤다(내가 안 하면 정말 안 되는 규모의 팬덤이었다). 음원을 스트리밍/다운로드하고, 정체도 모르는 앱을 다운받아 내 아이돌을 투표하고, 네이버TV 영상에 가서 댓글을 달고... 앨범도 n개 이상 샀다.
왜 내가 덕질이라는 취미활동을 하는데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면서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팬덤 내부에서 '노동'이라 불리는 행위들은 실제로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라기보다는 정말 '일'에 가까웠다. 힘이 들고 재미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 '노동'을 하면 내 아이돌의 광고가 지하철에 걸리고 인기 동영상에 노출된다는데. 아이돌 산업처럼 그 소비자를 쥐어짜내고 힘들게 하는 산업은 단언컨대 없다. 몇 년간 아이돌 덕질을 하며 '노동'에 지쳐버린 나는, 이 그룹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이돌 덕질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된다(현재진행형).
사진: Unsplash의freestocks
돌이켜보면 아이돌을 덕질할 때만큼 덕질에 온 몸과 마음을 바치는 시기는 없는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업 자체가 덕질하는 팬들에 초점을 맞추어 쥐어짜내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과몰입을 조장하는 산업구조 속에서, 팬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행복한 모습을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갈아넣어 '노동'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노동'을 하는 만큼, 점점 아이돌에게 바라는 것도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팬이 아이돌을 위해 이렇게 공을 들여 노동해줬으니,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아이돌이 해주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팬들에게 더 웃어주길 바라고, 팬카페에 글을 더 자주 써주길 바라고, 팬들이 준 선물을 더 성심성의껏 인증해주기를 바란다. 아이돌 덕질을 오랜 시간 하면서 점점 나는 이 구조가 서로를 괴롭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들은 '노동'하느라 지치고, 아이돌은 일거수일투족을 평가당하고.. 덕질할 때는 가장 열성적으로 했었지만, 지나고 난 후 생각해보면 제일 현타오고 시간과 돈이 아까운 덕질이 아이돌 덕질이었음을 여기에라도 고백해본다.
몇 번의 아이돌 덕질을 거친 후 다른 분야의 덕질을 하면서, 가끔 팬들이 덕질대상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 같다, 싶을 때면(SNS를 자주 해달라든지, 팬서비스를 해달라든지.. 등등) 나도 모르게 하는 말이 있다. "뭘 그런 것까지 바라고 그래? 아이돌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하고 나면, 다시 또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럼 아이돌한테는 바라도 되고? 하는... 실제로 요즘 아이돌은 '버블' 같이 팬들과 대화하는 플랫폼에 누구는 많이 오네 누구는 성의가 없네 하고 '소통'마저 평가받는다고 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건강한 덕질같지는 않다. 팬들의 과한 '노동'과 그에 따라 아이돌에게 주어지는 많은 굴레들이 이제는 좀 줄어들었으면 좋겠다(산업의 발전방향을 보아하니 그럴 리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 이상, 내가 다시 아이돌을 좋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아이돌C를 '내 인생 마지막 아이돌'이라고 부른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