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추억으로 남기기로 해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듯이 끝도 있는 법이다. 덕질도 마찬가지다. 덕질 대상의 모든 것이 궁금했던 초반을 넘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파악을 끝낸 안정기를 지나, 내 기대와 다른 모습에 실망하거나 덕심이 식는 시기도 경험할 수 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덕(덕질을 잠심 쉼)이나 탈덕(덕질을 그만둠)을 하게 된다. 내가 요즘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탈덕 그 자체가 아니라, 탈덕을 하는 방식이다.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탈덕 방식에 대한 내 생각을 어렵지만 한번 써보려 한다.
사진: Unsplash의Marah Bashir
마음 돌린 팬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돌이켜 보면 팬(덕후)은 얼마나 집요한 존재인가? 입덕한 대상의 인스타그램 과거 게시물을 전부 복습하고, 그의 과거 행적을 구글링 하며, 그의 사소한 습관이나 버릇까지 전부 파악한다. 물론 이 모든 집요한 행위는 긍정적인 의도로 이루어진다. 덕질 대상의 작은 특징 하나하나까지 찾아내서 좋아하고 또 좋아하기 위해 파고든다. 덕질이 유지되는 한, (일단은) 이 행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덕질 대상에게도 좋은 일이고, 덕후에게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이렇게 집요한 덕질을 했던 덕후가 탈덕을 했을 때 벌어진다. 이 덕후의 마음은 이미 덕질 대상에게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떠났다. 하지만 그 덕후에게는 여전히 덕질 대상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남아 있다. 그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긴장했을 때는 어떤 버릇이 나오는지, 친한 친구는 누구이며 그 친구들과 평소 인스타에서 어떤 댓글들을 주고받는지 등등. 덕후가 탈덕했을 때, 가끔 이 수많은 정보들은 기존의 덕질 대상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탈바꿈된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덕후가 덕질 대상에게 크게 실망할 수 있고 그 이유로는 수만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프로의식이 없어 보이게 행동했을 수도 있고,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팬들을 기만했을 수도 있고, 심한 경우 9시 뉴스에 나올만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 여하간 덕질 대상이 한 어떤 행위 때문에 덕후가 크게 상처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상처받은 덕후가 할 수 있는 대응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생각하는 보편타당한 탈덕 방법은 '좋아하기를 그만두는 것'밖에 없어 보인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자신(덕후)이 덕질 대상에게 느낀 배신감과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문의 탈덕문을 쓰고, 내가 왜 그에게 실망했는지를 모두에게 알린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즈음의 팬덤(덕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트럭 시위를 하고, SNS 계정을 파서 내가 덕질했던 대상을 공격하고, 그가 사과하고 탈덕의 원인이 된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런 공격 과정에서 그간 덕질할 때 모았던 정보들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내가 너 지난달에 ㅇㅇ 가서 ㅇㅇ했던 것도 모른 척해줬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와 같은 식이다(ㅇㅇ 가서 ㅇㅇ했던 것이 해당 연예인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어떤 것이라는 가정 하에).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내가 정말 실망해서 탈덕했던 구 덕질 대상들을 대입해 고민해 보아도, 내가 탈덕했다고 해서 이전에 덕질했던 사람을 처벌/징벌할 권리가 생긴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더군다나 기존에 덕질할 때 모았던 정보들을 활용(?)해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일견 무섭게까지 느껴진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내 의견에 대해 '나는 덕질 대상과 함께 그의 성공을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앨범을 사고 노동을 하고...), 그는 이런 내 노력에 부응하지 않았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버릇을 고쳐놔야 한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덕질 대상의 성공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든지, 그것은 내가 좋아서 한 것이지 덕질 대상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결국 나 좋자고 했던 것들이다. 나 좋자고 했던 그 행위들이 덕질 대상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게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랑했고 가깝게 느꼈다 한들, 덕질 대상은 타인이고 그는 그의 방식대로(그게 옳든 그르든) 인생을 살아간다. 덕후로서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그를 좋아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를 내가 원하는 대로 개조하거나 혼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에게도 어떤 이유로든 크게 실망하여 덕질하기를 그만둔 사람이 있다. 가끔 내가 열심히 저장해 두었던 그의 예전(덕질할 때의) 영상을 보면, '아 나 이때 이 사람을 정말 좋아했었지, 이 사람의 이런 부분이 정말 사랑스러웠지. 나 정말 진심이었구나'와 같은 생각에 잠긴다. 나에게 탈덕이란 딱 그 정도의 추억이다. 이전처럼 좋아하지 않고 지금은 관심도 없지만, 과거에 열렬히 사랑했던 존재. 그 이상으로 (구) 덕질 대상에게 뭔가를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다. 덕질할 때도 지켜야 할 선이 있듯이, 탈덕할 때도 예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