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기억
가장 오래된 기억이 있다. 28년 전 네 살 때, 산골마을로 이사하던 장면이다.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지날 때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안에서 뭔가를 찾기 위해 실내등을 켰다. 도착해서 보니 장롱 안에 붙어 있는 유리에 금이 가 있던 기억도 난다. 그전에 살던 곳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이 산골마을, 시골이다.
강아지는 물론, 닭, 오리, 토끼, 흙염소까지 웬만한 가축들은 다 키워봤다. 아예 꿩농장을 하던 때도 있다. 앵두, 보리수, 딸기, 호박, 옥수수, 깨, 고추까지 웬만한 식용작물은 다 키워봤다. 쌀 농사를 지은 적(길진 않지만)도 있다.
'읍내'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20여분 달려야 했다. 그나마 두 시간에 한 대 정도밖에 없었다. 내가 조금 늦거나, 버스가 조금 빨리오면 떠나는 버스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때문에 소심한 성격에 입술을 깨물고 '히치 하이킹'을 감행한 적도 여러번이다.
학교는 참 멀게 느껴졌다. 여섯 살 걸음으로 40분 남짓 걸렸다. 지름길로 가려면 논두렁길을 통했다. 양말을 벗고 개울을 건넜다.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가 미끈거려 발을 들어보니 피라미 한 마리가 끼어있던 적도 있다.
위험하기도 했다. 윗마을에 골프장을 짓는다고 덤프트럭들이 수시로 오고 갔다. 산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친구들이 준 '팁'대로 덤프트럭이 지나갈 때 신나게 두 손을 흔들면, 인심좋은 기사님들이 '보름빵'같은 간식을 투척해주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심심했다. 집에 돌아오면 혼자서 딱히 할 게 없었다. 강아지들과 놀거나, 혼자 놀이를 만들었다. 크레파스로 부서진 벽돌을 꾸며 자동차 장난감을 만들었다. 호미로 마당에 작은 구멍을 파고 참치캔을 심어 미니 골프장을 만들었다.
우리 학년엔 16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가장 인원 수가 많은 학년. 거의 그대로 유치원 2년에 초등학교 6년까지 8년을 같은 반으로 지냈다. 생일 순으로 정한 학급번호도 6년 동안 같았다. 16명이 졸업한 다음해, 우리 학교는 분교가 됐다.
학교에선 시험이 없었다. 누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었다. 도시 아이들과 비교하면 공부엔 소홀했다. 그래도 여러모로 기회가 많았다. 학교 대표로 시 체육대회도, 수학경시대회도, 과학대회도 나갔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일찌감치 수업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주변 마을들을 쏘다녔다. 3㎞ 정도 길이 언덕길을 40~50분 정도 힘겹게 올라가서 10분만에 질주해 내려오는 쾌감은 20년이 지나도 생생한 기억이다. 친구들과 칡을 캐고 뱀을 잡았다. 이건 어떤 이파린지, 이건 어떤 곤충인지 서로 가르쳐주고 서로 배웠다. 노는 게 공부였다. 동네 아저씨와 산을 누비며 개구리를 잡기도 했다. 가까운 호수에서 밤샘 낚시를 하며 빠가사리와 민물조개를 잡기도 했다.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통학이 조금 불편했지만 적응이 어렵진 않았다. 귀가 버스 시간이 정해져있어 나름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고등학교 때부턴 다른 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대학생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학교 주변에 살고 있다. 시골집엔 잦으면 2주, 아니면 2달에 한 번 정도 간다. 서울이 지겨울 때, 지칠 때 시골에 가면 충전이 된다. 복잡함과 바쁨에서 벗어나, 기댈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집에서 키우던 고양이와 강아지가 시골집에 있다. 하루이틀 집을 비웠다 들어오면 여지없이 우울해보이던 아이들이다. 갇힌 공간이 열리자 표정도 밝아졌다. 넓고 열린 공간에서의 생활은 마음을 넓히고, 또 연다.
시간과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면 꼭 시골에서 살고 싶다. 이번 여름휴가는 조금 길게 낼 생각이다. 아예 '이주'가 아닌, 잠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공기가 맑아질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