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16년만에 16일

by peacegraphy

15년 5개월.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이자,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다. 30년 10개월을 살았으니 절반은 부모님과, 절반은 나와서 산 셈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집에는 잦아야 2주에 한 번만 갔다. 대학교 때 집에서 과외수업을 하느라 매주 갔을 때도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길어야 3박4일이었다.


이번 휴가를 시골에서 보내면서 16일을 통째로 부모님과 있었다. 집에서 잠만 잔 게 아니다. 해 뜰때부터 해 지고나서까지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 같이 일하고, 놀고, 먹었다.


언제부턴가 부모님과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엄마. 잡티 하나 없이 맑고 순수한 우리 엄마. 온실에서만 자란듯한 스물다섯 목련꽃은 아빠를 만난 후, 쉽게 시들지 않는 해바라기가 됐다. 서른다섯때부터 시작한 시골생활, 늘 부족하기만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대신 쉽게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3년 전부턴 매년 해외여행을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작년엔 대만에서 2박3일을 보냈는데, 엄마는 그게 제일 기억에 남나보다. 훌륭한 아침식사를 할 때마다 '대만의 아침'이라며 기뻐한다. 여행 기간 내내 비가 내렸는데, 셋이 노란 우비를 입고, 비마저 좋다며 신나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올해 여행지는 우리집으로 정했다. 그 대신 길게. 같이 일하고, 놀고, 먹고. 그냥 살았다. 그게 좋았다. "16년만에 16일~~ 떨어져 산 이후에 가장 오래 같이 살았다고 아빠가 엄청 좋아하시네(하트)". 엄마아빠도 좋았나보다.


가족끼리 생활을 공유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세대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다. 무엇보다 삶의 공간을 서로 넘나들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아마도 서울에 살고 있을 누군가가 말했다. 결혼하고 나면 부모님과 떨어져 살텐데, 그 전까지는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지만 바쁜 일상에 허덕이다 밤늦게 들어가 아침 일찍 나온다면, 같이 있어도 그리움만 쌓이지 않을까.


시골은 그런 게 없다. 일도 농사도, 요리도 놀이도 다 같이 한다. 시골엔 '제대로', 완전히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 서로가 언제 행복한지 알아갈 수 있다. 아빠는 나랑 같이 힘쓰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 표현이 서툰건지 아끼는지 잘 안하는 분인데, 일할 때 보면 좀 티가 난다. 엄마는 내 존재만으로 행복한 것 같다. 엄마가 쓴 글을 보면.



우리 아들 평화

나에게는 1남1녀가 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아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위로 딸이 있어 몇 달 내내 마음조리며 아들이었으면 했다. “아들이네요” 하는 간호사 말에 온통 주변에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메아리침을 느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 돼준 아들!

첫째인 딸을 키울 땐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라 시어머니께서 도와주셔서 수월했다. 그러다 둘째를 혼자 키우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날의 감격을 떠올리며 이겨나가곤 했다. 이름도 하나님 주신 선물이란 뜻으로 평화라고 지었다. 아이가 네 살 때 시골로 이사를 오게 됐다. 숲 속 외딴집에서 혼자 크는 아이를 보며 ‘아말라와 카말라’ 이야기가 생각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정글북 동화에 나오는 늑대소년이 키운 아이 말이다. 아들은 아이 걸음으로 40분 정도 걸리는 병설 유치원에 다녀오는 길에 들꽃을 꺾어 선물이라며 내게 주곤 했다. 혼자 걸어오며 심심해서 ‘가나다라마바사아’를 ‘기니디리미비시이’까지 외우며 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아빠는 왜 이렇게 먼데다 집을 지었어? 학교와 집 중간쯤에다 지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했다.

비오는 날엔 아빠가 차를 태워다 주기로 해서 비오기만 기다리던 꼬마 아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사업을 하던 아빠가 IMF 위기를 맞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수년 간 힘들게 살았다. 그런데도 구김살 하나 없었다. 오히려 대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친구가 그 시절 IMF 겪은 얘기를 할 때 더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아들은 어느새 장성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딸이 시집가던 해에 아들이 바로 취직이 돼 바톤 터치가 제대로 이뤄진 셈이다. 딸이 시집가기 전 엄마랑 해외여행 한 번 하고 싶다고 해서 모녀가 일본 북해도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것이 유일한 해외여행이 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들이 아빠 엄마를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마침 그때가 환갑 무렵이라 산후 조리중인 누나가 코치를 한 것이다. 아들은 유럽으로 가자고 했지만, 평소 얼굴도 자주 못 보던 아들과 2박3일 같이 있게 된 것 만으로도 대만족이라 여긴 나는 가까운 대만으로 가자고 했다.

아들은 자칭 효도여행이란 타이틀을 붙이며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했다. 지우펀의 진풍경도 좋았다. 홍등 사이로 걷는 재미도 있었다. 예류 지질공원의 독특한 암석들도 인상적이었다. 여행 내내 비가 와서 노란색 우비를 입고 다녔다. ‘셀카’를 찍고 보니 병아리 가족 같아 웃음이 절로 났다. 여행 중엔 모든 것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 야시장 돌아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중정기념당에 있는 효자문 앞에서 인증샷을 날리며 흐뭇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타이페이101 빌딩도 가봤다. 참으로 감회가 깊은 시간이었다. 이제는 아들이 가이드 노릇을 하며 인도해주니 우리가 어린아이가 된듯했다. 의지가 되고 편안한 여행이었다. 그걸 보고 아들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가족은 복수가 아니고 단수구나. 같이 숨 쉬고 함께 희로애락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나가 되지 못한 가족은 정말 불행한 것이구나. 잠시 깊은 상념에 잠겨 이산가족의 아픔까지 내 아픔으로 다가왔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이 돼준 아들이 의젓하게 자라서 옆에서 알뜰살뜰 보살펴주니 무뚝뚝한 아버지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친구처럼 속내도 털어놓고 대소사를 의논해가며 앞으로도 물 흐르듯 살아가겠지. 아들아. 사랑한다. 고맙다.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난다던 아들. 가끔 서울로 오라고 해서 영화구경도 같이 하고 명소도 돌아보며 직접 요리도 해주는 네가 우리에겐 아주 특별한 아들이란다. 옷은 물론 신발이며 핸드백, 모자에 목걸이까지 다 사다 준 아들. 네가 가져다 준 꽃무늬 찻잔에 오늘도 모닝커피를 타 마시며 너를 위해 기도한다. 떨어져 살아도 항상 함께인 아들아. 아직도 내게 한 가지 바람이 남아있다면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나 손주도 하나쯤 안겨주고 먼 훗날 우리아들도 이런 소소한 감동을 맛보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아마 그때 비로소 효도의 완결판이...



만 나이로 나는 서른하나, 엄마아빠는 예순둘. 딱 2배를 사셨다. 언제 아파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우리에게 시골, 함께 할 공간이 소중한 이유다.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기대받았던만큼 크게 성공한건 아니다. 그래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아들이 내 나이가 됐을 때 내게 해주길 바라는 모습을 꾸준히 부모님께 보여드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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