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람, 보름동안 시골살기

'깐순이네민박', 문열다

by peacegraphy

수요일 저녁. 회사 업무를 마치고 18일 간 장기 휴가를 받아들었다. 큰 고민없이 곧바로 안성행 버스에 올랐다. 휴가 기간 중 잡았던 서울 약속들도 모두 취소했다. 시골을, 내 고향을 만끽하고 싶었다.

첫날 새벽, 물에 불린 옥수수씨를 텃밭에 심는 와중에 휴가 중 첫 해가 떴다. 뒷산 자락을 타고 빨간 해가 솟는다. 밤사이 수박이 얼마나 자랐나 호박이도 오이는 딸만큼 컸나 확인한다. 깐순이와 아침 러닝을 하고, 유치원 통학버스가 오는 곳에 조카를 데려다주니 오전이 훌쩍 지난다.


이미 여름은 절정다. 휴가 끝자락엔 섭씨 38도를 웃도는 더위가 찾아왔지만, 34도 안팎의 더위도 충분히 과한 여름이다.


더위 덕분에 '심심한' 시간이 많을 뻔했다. 아침에 소일거리들을 해결하고 점심을 준비해 먹고 나면 오후 한시쯤, 더워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번 휴가 기간 장기 시골 체험을 이끈 영화 '리틀포레스트'도 다시 한 번 보고, 낮은 그렇게 흘려보내면 된다.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다. 여러 가지 고민들을 정리할 시간이다. 시골이 좋다면, 일단 난 아직까진 좋은 것 같은데, 여기에 살려면 뭐가 필요할까? 일단 돈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서울에서 버는 만큼, 아니 조금은 더 벌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이 욕심을 버린 못했다.


시골에서 살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전통적인 농사로는 돈이 안된다. 4차산업혁명을 농업에 접목시킨다면? 많이 들어봤지만 감이 오진 않는다. 내 전문분야도 아니고, 사업엔 리스크가 따른다.


염소나 양, 닭 이런 동물들을 많이 키워볼까? '가성비'가 떨어진다. 투자비용과 폐사 리스크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이 크지 않다. 투입과 산출의 시간 차도 부담이다. 분뇨 처리도 골칫거리. 단기간 고민으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이 별로 없다.



'있는 걸 활용하자'.

생각이 여기까지 닿았다. 팔려고 내놓은 집이 있다. 건축가인 아버지가 고급 자재를 쏟아붓고 공들여 지은 집인데, 팔려고 내놓아도 나가질 않고 있어 천덕꾸러기, 찬밥 신세였다.


특별한 집이다. 대지 210평에 건평은 90평. 원래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공방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지은 집이라 1층은 40평대 넓은 탁트인 공간이다. 갤러리나 카페로 쓰기 적합한 공간이다. 그런데 이 시골에, 누가 갤러리나 카페를 열까. 공방을 용도로 쓰는 게 최곤데, 집을 보고 마음에 든다는 사람들은 꼭 돈이 부족하다고 한다. 꼭 맞는 새 주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원가 밑으로 땡처리하기엔 너무 아까운 집이다.


"이 공간을 내가 써야겠다."

사진 갤러리를 운영하는 건 내 오랜 꿈이다. 대학시절 학보사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사진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기도 했다. 서울집에도 액자를 몇개 걸어놨지만, 사적인 공간이다보니 볼 사람이 많지 않다. 이 공간에 사진을 전시하고 공유한다면? 갤러리와 관람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한아름만한 소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이어진 목조계단을 타고 오르면 2층이 나온다. 테라스에 서면 숲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한참 여유있게 높은 천장과 넓직넓직 뚫어놓은 창문들은 마음을 뚫어준다. 3층엔 침실, 여기선 '논뷰(view)'를 만끽한다. 다락방은 서비스. 이런 생각 끝에, 이런 공간을 이대로 묵힐 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될까? 하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에어비앤비에 숙소를 등록했다.


등록한 지 하루만에 게스트들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직접 답사를 와보고 싶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바빠졌다. 이십몇년 전 꿩농장을 한 이후 '가족사업'이 생긴 셈이다. 8월 초 주말 예약이 꽉 찼다. 우리만 몰랐던 우리의 보물이었다.


집 근처 계곡이나 개울, 놀거리를 찾아 우리가 먼저 답사를 다녔다. 폭염에 물이 많이 말랐지만 놀만한 곳은 몇군데 찾았다. 본가에 '잉여'로 남아있던 가구들도 옮겨 놨다. 페인트칠하고 청소하고, 심심할 시간이 사라졌다.


이 집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안보이던 점이 보였다. 전세 세입자가 1월 나간 이후 반년 동안 방치됐던 집이다. 생기를 얻은 집은 다시 태어났다. 곰팡이 냄새가 사라지고 나무 향이 나기 시작했다. 1층은 나만의 갤러리이자 원테이블 레스토랑이 됐다. 공연장이냐고 묻는 손님도 있었다.


더위를 잊었다. 집 안에만 들어오면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시원하다. 숲속 입지와 설계 덕이다. 2층과 3층도 에어컨을 틀면 금방 시원해진다. 밤에는 영화관으로 변신한다. 공간이 넓어 빔프로젝터를 활용하기 제격이다. 부모님은 휴가지에 온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


답사 차 집을 사전 방문한 게스트들도 감탄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사진보다 훨씬 좋다고 한다. 사실 보통 펜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급 자재로 꾸몄고, 넓다. 게스트는 이 가격에 이런 곳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번 시즌은 처음인만큼 특가세일이다. 고마운 손님들이다.




보름 동안 여행지에서처럼 살았다. 마음껏 먹고, 자고, 일했다. 마당에서 마음껏 뛰어놀아 산책에 목마르지 않은 강아지들과 언제라도 스킨쉽할 수 있었다. 피부는 살짝 그을렸지만, 마음엔 여유가 생겼다. 서울로 가는 발걸음이 쉬이 옮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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