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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Dec 18. 2021

덕밍아웃

4살이 된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나에게 어느 정도 자유의 시간이 허락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나의 자유시간이었지만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뭐지... 나도 당황스러운 나란 인간.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일들로 가득차있었다.

전시회도 가고, 서점도 가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

그런데 왠걸,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아-무-데-도 나가기 싫었다.

남편은 집에서 나오지 않는 나를 심히 걱정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예쁜 하늘 사진과 풍경을 찍어 보내면서 지금 당장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오라며 재촉했다. 심지어 교회 심리 상담 센터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제2의 한비야가 꿈일정도로 외향적이었고, 20대에 10개국이 넘는 나라를 여행다니던 내가 집 밖을 안나오니 걱정이 되긴 됬나보다.


막상 집 밖을 나가려고 거울앞에서 나 자신을 보면 의욕이 사라진다. 살은 쪄서 피부는 쳐져있고, 만성 아토피인 둘째를 케어하느라 깊은 잠을 못자서 안색은 안좋고, 나이 35살인데 흰머리가 확 늘었다. 미용실을 안간지 1년이 넘어 치렁치렁한 내 머리는 헤그리드처럼 엉켜있기 일쑤였고, 집앞 작은 언덕길을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숨을 헥헥거릴정도로 체력이 바닥이었다. 하... 갔다오면 힘들텐데 뭣하러 나가냐. 애써 먹은 마음을 취소했다.


지나와 생각해보니 난 번-아웃 상태였던 것 같다. 7년간의 독박육아 속에서 달리는 마차와 같이 쉴 수 없었던 나는 몸도 마음도 말그대로  번-아웃, 불타서 재만 남은 상태었을지도 모르겠다. 의욕도 자신감도 사라지고, 자존감이 낮아진 나 자신은 그저 타고 남은 재처럼 그자리에 생기없이 흩뿌려져 먼지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서울로 다시 이사오자마자 시작된 코로나로 인해 1년간 가정보육을 하면서 지칠대로 지친 나는 우울증의 경계에 있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등원시킨 후 한 동안 나는 그저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핸드폰이나 컴퓨터 화면만 보면서 시간을 다 보내고 아이들을 맞이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구나... 작은 휴대폰 액정 속, 더 작은 네모난 어플을 통해 세상을 구경했다. 분명 내가 있고 싶은 곳은 방구석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 속이 아니라, 탁트인 강릉앞바다 아니면 강원도 양떼목장인데 난 그저 핸드폰 속 기가 막힌 풍경속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만 있었다.  



여느날 같이 나는 쇼파에 누워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발견한 영상은 방탄소년단의 '버터(butter)' 뮤직비디오였다. 나온지 한시간도 안된 따끈한 뮤비였는데 ... 이 영상을 본 것이 올 한 해 나에게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이자 행복이 아니었을까싶다. 2001년 H.O.T 해체 이후로 아이돌과 담쌓았던 내가 (중간에 지드래곤 좋아하긴 했 ...)  20년만에 아이돌의 노래를 무한재생하며 듣게 될 줄이야. (숨스...)




사실 처음엔 버터를 듣고 '노래 참 좋다. 애들도 멋있네' 그러고 다음날에도 찾아들으면서 좋아하는 정도였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이 알려준 그래미(스캐미) 사건으로 인해 방탄에 대해 더 궁금해졌었다. 이들이 누구길래 한국 팬도 아닌 해외 팬들이 그래미 사건에 말 그대로 분.노 하는가... 사실 방탄에 대한 궁금증은 여기서 시작되었었다. 방탄에 대해 알아가면서, 방탄의 음악을 알아가면서 참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의 삶을 통해서, 가치관과 태도를 통해 그리고 노래 가사를 통해서. 어느새 나도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그 당시엔...) 덕질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집밖에 안나오던 내가 집에서 방탄 영상만 찾아보고 틀어박혀있으니 더 깊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해석하고, 달방 정주행하고, 안듣던 노래들을 듣고 있는 낯선 아내. 말은 영어공부라고 하는데 허구헌날 BTS Reactoin 영상을 보고있는 이상한 아내. 나를 알아온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이돌 덕질하는 아내의 모습은 처음 봤으니 이상하지 않을리가 없겠지. 처음엔 나보고 정신차리라면서 뭐라고 했다. 너는 '아미'가 아니라 '애미'라면서, 욘사마 쫒아다니는 일본 아줌마들 같다면서. 처음엔 억울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이제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뭐 하며 스스로 아미를 자처하며 그저 나의 덕질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어덕행덕: 어차피 덕질할거 행복하게 덕질하자). 고맙게도 남편도 이젠 나에게 방탄 현수막을 얻어다줄 정도로 나의 방탄 사랑을 이해해주고 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진심어린 마음의 메세지가 있는 노래에는 힘이 있다. 처음 러브 유어 셀프 시리즈에 수록된 곡 'Answer : lovemyself'를 듣고 느꼈던 벅찬 마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을 뜬다 어둠 속 나 심장이 뛰는 소리 낯설 때
마주 본다 거울 속 너 겁먹은 눈빛 해묵은 질문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니가 내린 잣대들은 너에게 더 엄격하단 걸
니 삶 속의 굵은 나이테 그 또한 너의 일부, 너이기에
이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자 버리기엔
우리 인생은 길어 미로 속에선 날 믿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은 오는 거야

차가운 밤의 시선 초라한 날 감추려 몹시 뒤척였지만
저 수많은 별을 맞기 위해 난 떨어졌던가
저 수천 개 찬란한 화살의 과녁은 나 하나

You've shown me I have reasons
I should love myself 내 숨 내 걸어온 길 전부로 답해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
(I'm learning how to love myself)
빠짐없이 남김없이 모두 다 나

정답은 없을지도 몰라 어쩜 이것도 답은 아닌 거야
그저 날 사랑하는 일조차 누구의 허락이 필요했던 거야
난 지금도 나를 또 찾고 있어 But 더는 죽고 싶지가 않은 걸 슬프던 me 아프던 me 더 아름다울 美

그래 그 아름다움이 있다고, 아는 마음이
나의 사랑으로 가는 길 가장 필요한 나다운 일
지금 날 위한 행보는 바로 날 위한 행동
날 위한 태도 그게 날 위한 행복
I'll show you what i got 두렵진 않아 그건 내 존재니까
Love myself

시작의 처음부터 끝의 마지막까지 해답은 오직 하나
왜 자꾸만 감추려고만 해 니 가면 속으로
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 다 내 별자린데

You've shown me I have reasons I should love myself
내 숨 내 걸어온 길 전부로 답해

내 안에는 여전히 서툰 내가 있지만
You've shown me I have reasons I should love myself
내 숨 내 걸어온 길 전부로 답해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



...

정말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나 싶을정도로 놀랄만큼 공감되는 가사에 왈칵 눈물이 났었다.


- 매직샵(magic shop), Whalien 52, 소우주(microkosmos), 00:00,  blue & grey 등등 ... 지치고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노래들을 통해 위로 받았고,

- fake love, 페르소나 등을 통해 참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 tomorrow, black swan 등의 노래로 내가 꿈꿔왔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나설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가 희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들은 페르소나로 주어졌고, 일상 속에서 페르소나의 비중은 점점 커져 나의 참자아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딸이자 토끼 같은 자매들의 엄마였고, 시댁에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하는 막내 며느리였다. 동시에 사랑하는 목사 남편의 아내이자 교회에서는 사모였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고 어쩔 땐 광범위하여서 때로는 나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살면서 나 자신에게는 귀기울이지 못하던 시간들은 참 괴로웠던 것 같다.



 방탄소년단 앨범의 화양연화 시리즈를 처음 접했을 때는 참 많이 울었다. 나의 화양연화가 끝이 난 것 같아서 마음이 아리고 쓰렸다. '영원히 소년이고싶어 나!' 하고 외치던 제이홉의 독백이 마음에 쾅하고 내려앉았을 때 슬프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리고 고맙게도 그들은 화양연화의 끝은 새로운 화양연화의 시작임을 알게 해주었고, lovemyself(러브 마이 셀프)의 여정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무슨 아이돌 노래에 그리 대단한 철학이 있겠나 싶은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실제로 MAP OF THE SOUL 시리즈 음반은 머리 스타인의 심리서 《융의 영혼의 지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한 이건 다만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노래를 통해 인생이 바뀐 아름다운 스토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실로 인종과 국경을 넘어선 놀라운 사랑이 방탄과 A.R.M.Y 들을 통해 전세계에 흘러가고 있는 아름다운일들이 세계 곳곳에 이뤄지고 있다. (최근 콜드플레이와 콜라보한 신곡인 'my universe'가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 재능 또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You can call me artist

You can call me idol

아님 어떤 다른 뭐라 해도

I don't care

- 방탄소년단  'IDOL' 중...


사람들은 그들이 아이돌이고, k-pop 가수고 하면서 많은 기준과 잣대를 대고 평가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할 뿐.



싫고 귀찮았던 바깥산책도 두 귀에 에어팟을 꼳고 노래를 들으며 걸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문 밖을 나서기 시작하고 걷기 시작했다. 한강을 걷고 노들섬을 걸으면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리프레쉬가 되었다. 집 앞 작은 언덕은 거뜬히 걸어 올라 올 수 있게 되었다. 방탄의 노래는 나에게 위로를 주었고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더 내 삶을 아름답고 소중히 여기고 싶게 만들어주었다. 나의 페르소나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참 자아를 찾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어린시절 부터 음악을 너무 사랑했고, 음악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다. 가수가 꿈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글쓰는 것을 좋아해서 학창시절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많은 상을 받았었고 다이어리는 깨알같은 글자로 빼곡히 채워져있을 정도로 쓰는 것을 좋아해서 사랑하는 음악을 하며 작사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고 싶었고, 가난하고 소외된자들을 돕고 싶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하며 나 자신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나는 이렇게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그림책 심리 공부를 하고 있다.



방탄 덕질은 나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으로 인도해주었고 결국 그 끝에서 발견한 것은 기독교 신앙안에서의 나 자신이었다.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은 결국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다시금 내 안에서 회복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덕질이라는 어감이 주는 음지적인 느낌이 나 스스로도 떳떳하지 않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그건 고리타분한 생각이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덕질을 통해 내가 행복하고 내가 성장할 수 있다면 그보다 감사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남편은 자전거 덕질 중이다. 자전거 동호회 카페를 기웃거리면서 자전거 구경을 하고 또 지인들과 한강에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오는 것이 참 기쁜 일이다. 우리 딸들은 지금 만화 캐치티니핑 덕질중이다. 캐치티니핑 피규어를 모으고 동생과 함께 가지고 노는 것에 진심이다. 그리고 나 자신은 또 새로운 덕질을 시작했다. 그건 다음 글에서도 쓰여지겠지만 바로 '그림책테라피'이다. 그림책이 얼마나 나에게 힐링과 영감을 주는지 나는 그 매력에 지금 흠뻑 빠져있다.



덕질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 나 자신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남에게 해가 되는 덕질

2) 나를 성장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주게 하는 덕질


방탄소년단이든, 자전거든, 애니메이션이든, 그림책이든 어떤 것도 이것이 선하고 악하다고 할 수 없고, 이게 더 대단하고 덜 대단하다고 할 수 없다. 나의 현생(real life)과의 균형을 잘 맞춰가며 건강한 경계선을 잘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행복하게 오래 덕질 할 수 있으니까.  방탄소년단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 삶에 전부는 아니다. 나는 내가 살아내고 책임져야할 나의 삶과 가족이 있고 나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의 노래와 삶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이 더 행복해지고 윤택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덕질이라고. 진심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내가 사랑하는 타샤튜더 할머니도 어떻게 보면 꽃과 식물 그리고 드로잉 덕질을 하였고,

심리학자 프로이트나 융도 정신분석 연구에 덕질한 셈이다.

수많은 성공을 이룬 기업가나 아티스트 또한 덕질한 무언가로부터 그들의 타이틀을 얻었지 않나.

어짜피 덕질할거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의 발자취로 남길 바라며 나의 방탄 입덕기를 적어보았다.



글을 적으면서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lovemyself, lovemyneighbor 그리고 가장 먼저 love my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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