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매미가 여름의 배경음악을 자처하던 어느 여름이었다. 교회 청년부실에 앉아서 모임을 준비하는데 한 남학생이 찾아왔다. “누나 여기요.” 하며 내민 손에는 하얀 쪽지가 들려 있었다. 건네어 받은 쪽지를 펼쳐 읽고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 나를 본 친구는 “왜 유진아? 연애편지라도 받았어?” 하고 물었다. 다행히 나의 웃음 아래 울대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는 울음을 알아채진 못했나 보다.
「진아, 아빠다. 010-XXXX-XXXX」
이 쪽지를 받기 몇 달 전, 모처럼 아무도 없는 집에서 고요히 책을 읽었다. 창문 밖에서 우는 매미 소리와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어느 때보다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한 페이지에서 나는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떤 예열 시간도 없었다. 버릇처럼 소리 없이 울던 내가 난생처음으로 이성을 내려놓고 오열하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밀려오는 이 감정에 내가 삼켜졌다 느낄 만큼, 내 감정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이토록 울게 만든 것은 거창한 문장도 아닌, 단지 두 글자였다.
‘아빠’.
책 속에서 주인공이 아빠를 떠올리며 미소 지으며 웃고 있을 때, 나는 아빠를 떠올리며 울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중학교 졸업식 사진 속에 멈춰있었다. 깻잎머리에 줄여 입은 교복을 입고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내 옆에는 크지 않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모자를 눌러쓴 아빠가 서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빠를 참 좋아했다. 밤낚시를 따라가 별을 보며 라디오를 듣던 기억, 학교 운동장에서 노을을 보며 배드민턴을 배운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맞벌이하시던 엄마 대신 저녁을 챙겨주시고, 손재주가 좋아 조각도로 나무를 깎아 수석좌대도 만들고 조개껍데기로 공예품도 만들던 아빠는, 내가 만난 첫 요리사였고 선생님이었고 예술가였다. 함께 했던 따뜻한 추억들 때문에 어떤 말도 없이 떠나버린 아빠의 빈자리는 더욱 시리도록 서늘하게 느껴졌었다.
사춘기 시절,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인 양가감정은 때론 내 마음을 화상 입은 듯 아프게도, 타버린 잿더미처럼 만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는 나에게 가슴 속 깊이 숨겨 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울 던 그 날 이 후, 아빠는 활화산처럼 다시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그동안 미쳐 터져 나오지 못한 것들을 남김없이 쏟아 내는듯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리움에 마음이 콕콕 아려 올 때 마다, 뒤 따라올 슬픔을 감당하기 두려워 숨기려고만 했던 아빠라는 존재를 직면하기 시작했다. 마치 용암처럼, 뜨겁도록 치열하게 아파했고 그리워했다. 신기한 건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도 점점 마음이 괜찮아졌다. 아빠라는 존재와 나 자신을 점점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나타난 것이다. 마치 내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 울음소리를 들은 건 어쩌면 그동안 내가 아빠 대신 부르짖던 ‘하나님 아버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8년간 ‘아버지’라는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을 때 빼곤 내뱉어 본 적 없으니까. 이제는 아빠가 보고 싶다던 내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 듯 아빠가 나타났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나는 아빠의 쪽지를 못 본 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절감했다.
차마 전화할 용기는 없어 문자를 보냈다.
‘아빠…’
드디어 ‘아빠’라는 단어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순간이었다. 늘 대답 없던 이 단어의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을 보냈다. 택시를 타고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내가 살고 있던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 작은 도시의 토박이인 나에게 낯설리가 없는 그 동네가 어느 때보다 낯설게 느껴졌다. 목적지를 향해갈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가까워질수록 저 멀리 희미한 아빠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크지 않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모자를 눌러쓴 채 서 있는 아빠의 모습은 중학교 졸업식 사진 속 아빠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늘어난 주름만이 지나간 시간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아빠를 만나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지난 시간 충분히 원망했기에 더 이상 원망스러운 마음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리움이 끝났다는 것에 감사했다. 앞으로 새겨질 아빠의 주름이 더 이상 낯설지 않도록, 함께할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다시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기만을 바랐다.
그 후로 10년이 지났다. 아빠는 내 딸들에게 장난꾸러기 할아버지로 곁을 지켜주고 계신다. 한 여름 서울의 무더위나 장마로 연신 뉴스에 보도될 때면 어김없이 안부를 물으시고, 내 생일이면 누구보다 먼저 축하해주시는 아빠가 곁에 있다. 아빠를 다시 만나기로 결심 했던 그 때 그 10년 전 여름, 어느 여름보다 뜨겁고 치열했던 그 시간들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