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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Oct 09. 2021

1. 투머치 토커 엄마는 이제 그만

엄마가 되는 것은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글/그림 존 버닝햄)


제로웨이스트 키트를 수령하러 간 용산 청년지음 센터에 마련된 작은 북코너에서 만난 책. 예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그림책을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 책은 영국의 3대 그림책 작가 ‘존버닝 햄’이 글을 쓰고 그림 그렸다.





배를 끌고 강으로 간 검피 아저씨를 따라 온 동네 꼬마들과 염소, 송아지, 닭, 양, 돼지, 개, 고양이, 토끼들은 저마다 검피 아저씨와 약속을 하나씩 하고 배에 올라탔다. 얼마 동안은 신나게 배를 탔지만 이내 모두 검피 아저씨와의 약속을 어기더니 배가 기우뚱... 모두 물에 빠지고 만다.



사실 처음에 검피 아저씨가 아이들과 동물들을 태울 때,

태워주는 대신 “~하면 안된다” 하고 조건식으로 말할때까지만 해도 ‘나랑 비슷하네’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배가 기울어져 물에 빠졌을 때의 검피 아저씨의 반응은 나와 많이 달랐다. 경이로울정도로.



내가 검피 아저씨였다면,


“약속한거 지키기로 했으면 지켜야지 왜 약속을 어겨”

“너희가 약속을 어겨서 이렇게 됬잖아”

“이런식으로면 다시는 너희 배에 안태워줄거야”

라는 말을 했을 테고,


아이들은 쭈뼛거리게 되었을테고,

아이들의 사과를 받고서야

인심써주는 척 용서해주면서

다시는 그런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 처럼 주의를 줬겠지


그런데 검피 아저씨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햇빛에 몸을 말리게 한 후 이렇게 말한다.


 “다들 집에가자, 차 마실 시간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떤 비난도, 감정의 요동도 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아이들에게 따듯한 차를 내어주곤

헤어지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잘가거라, 다음에 또 배타러오렴’


밤이 될때까지 놀다간 동네꼬마들과 동물들



아 물론 나도 컨디션 좋을땐

“실수해도 괜찮아~”

“그럴수도 있지~”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거 이번에 잘 배웠지~?”

“다음엔 조심해서 타보지~”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의지적으로.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일관적이지 않아서 문제지.


그리고 꼭 필요한 말 외에 하지 않는 검피 아저씨를 보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어쩌면 좋은 의도일 수 있지만, 너무 많은 말들 속 부정적인 메세지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인식도 못한채 않하느니만 못한 말들을 쏟아내는 나를 반성한다.



육아를 하면 할 수록 나의 못난 부분을 많이 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이기 전에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단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 검피 아저씨를 보면서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가 사랑하는 존 버닝햄 할아버지.


이 책의 저자 ‘존 버닝햄’은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중요했던 경험과 과정은 억압받지 않고 자란 어린 시절에 있다. 노닥거리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진보적이었는데 특히 교육에 관해서 그랬다고 한다. 버닝햄은 여러번 학교를 옮겨 다녔고 마지막에는 대안학교인 서머힐 학교를 졸업했다. 그곳에서 버닝햄은 당시 가장 민주적이고 탈권위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를 이해하니,

검피 아저씨가, 이 이야기가 더 잘 이해 된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덜 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경험이 부족할 뿐.

                                                                  by. 존 버닝햄



 물에 빠진 아이들에게 굳이 잔소리를 보태지 않고 훈계하지 않아도, 물에 빠짐을 경험한 동네 꼬마들은 스스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배 위에서 싸우면 재밌는 뱃놀이를 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검피 아저씨도 아무 말 하지 않았겠지. 아이들이 경험해서 배웠으리라 믿는, 아이들을 향한 존중과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권위주의와 권위


가끔 나는 아이들보다 나 자신을 우월하다 여기며, 아이들을 계몽해야하는 대상으로 여길때가 있다. 경험하여 스스로 알아가는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할 때가 많다. 때때론 나의 편의를 위해 아이들을 억압하기도 하고, 나이가 많은 어른임을 무기로 내세워 아이들을 몰아붙히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그럴 때가 있다.


고등학교시절 무자비하게 친구들을 몰아붙이며 체벌하던 학주의 모습을 보고 무서워하던 내가, 강도와 방법만 다를 뿐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아이들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권위주위와 권위는 다른 것이란걸 글자로는 알았지만, 아직 나는 여전히 서툴고 방법을 잘 모른다. 확실한 건 내가 어른인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와의 대화


인스타그램에 이 책에 대해 짧은 후기를 써서 올리는 중에 7살 첫째가 와서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엄마 검피 아저씨 알아?”


“응, 지안이도 알아?”


“응!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읽어줬어!!”


“그래? 재밌었어? 검피 아저씨는 어떤 사람인거 같아?”


“응, 재밌었어 정말. 검피 아저씨는 착한거 같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그랬구나~ 엄마도 검피 아저씨 같이 착한 엄마가 되고싶어~ 우리 지안이 예안이에게 친절하고 따듯한 엄마가 되고 싶어~ 그런데 검피 아저씨처럼 잘 안되서 속상해”


그러자 첫째가 나를 꼭 안아주며,

“엄마 따듯한데?” 하며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나는 엄마가 너무너무 좋아”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

“지안이 울어?”


“응 엄마 눈물이나, 너무 속상해” 이런다.


내가 속상하다니까 자기도 속상했나보다. 나의 마음에 잘 공감해주는 첫째. 나의 속상함도, 나의 기쁨도, 나의 불안도, 나의 분노도 고스란히 자기 것 처럼 받아들이는 내 딸.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나의 감정들을 있는그대로 받아내는 딸에게 순간 순간 잘 가르쳐주어야겠구나, 잘 설명해주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란스럽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꽃으로도 때리지마라



등본상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여전히 내 속에는 과거의 어린 내가 나를 주장할 때가 많다. 그것은 상처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공포일 수도 있다. 그리고 행복한 추억일 수도 있고. 그림책을 들여다 보며 (그리고 성경을 보며) 계속해서 내 마음을 햇빛에 비추어 보면 나도 언젠가 성숙한 열매를 맺어가지 않을까, 나 스스로에게 응원을 보내본다.


엄마가 되는 것은,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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