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마음속에 남겨지는 건 화려한 건물이 아닌 좁은 골목길인 걸.
#1.
느지막이 눈을 떴다.
바르셀로나 대학가에 위치한 우리 집의 지리적 위치 때문인 건지 시내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건지 사람들은 밤이 깊었어도 잠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첫 잠자리를 설치며 느지막이 잤고 그만큼 천천히 눈을 떴다. 방을 마주하고 있는 주방으로 재빨리 들어간다.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의 애정이 묻어있는 곳이 주방인지라 공손히 인사하고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계란 스크램블을 하고 식빵을 노릇하게 구워 잼이랑 치즈랑 함께 입 속에 착륙했다.
향긋한 커피까지 함께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렇게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오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집 사람들은 다들 늦게 들어와 늦게 일어나거나 아침 일찍 학교 수업을 가러 가는 사람들의 일정 때문에 우리가 아침을 전세한 느낌이다.
“어째 우리가 집주인 같아.”
“그러게, 오늘 방 보러 온다고 하지 않았니?”
말도 안 되는 농담도 여기서는 그렇게 재밌다. 모닝커피까지 들이키고 나니 그제야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선명한 색을 머금고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푸르른 하늘을 보니 숨이 트이는 기분이다.
#2.
이 집에는 곰살맞은 두 명의 집주인 언니들과 바르셀로나로 해외근무 발령 중인 옆방 1호님(아직 성함을 몰라 우리는 방 호수로 이름을 대신했다) 그리고 2호실인 우리, 그리고 바르셀로나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들은, 잘 안나타는 3호님이 생활하고 있다. 스페인에 온 지 2-3년 째라 이제 스페인 적응기 신입 딱지 뗀 집주인 언니와 스페인에 온 지 4개월 째라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고 습득하는 중인 옆방 1호님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대화에 초대받았다.
대화의 내용은 서툰 스페인어였다.
“전화 통화할 때 너무 힘들어. 긴장되는 것도 있고, 특히 자동 응답기로 뭐라 뭐라 말할 때는 정말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려서 진땀을 빼기 일쑤야.”
그러자 그 모든 애로사항을 먼저 겪은 집주인 언니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럴 때는요 언니. 자동 응답으로 이야기가 흘러나와도 일단 용건부터 말하세요.
그러면 자동 응답이 상담원으로 연결해줘요. 저도 그거 몰라서 한참을 헤맸어요.”
타지에서 공부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홍수처럼 밀려 나온다.
“상담원이 물어보잖아요.
‘영어로 말할래, 스페인어로 말할래?’
영어로 선택하고 한참을 얘기하다가 그 사람이 폰 번호를 물어보는데, 스페인어로 숫자를 얘기하고 있지 뭐예요. 저는 이제 영어랑 스페인어랑 숫자가 헷갈려요.”
외국에서 살면서 이방인으로서 겪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과 언어의 장벽을 느꼈던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타국에서 어찌 서럽지 않고 억울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원하는 내일이 있고, 서로를 격려해 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또 한 번 웃고 털고 만다. 잠시 그들의 일상 속에 내가 조용히 침투한 느낌이다.
#3.
여자 둘의 나들이 준비란 여간 소란스런운 게 아니다.
“나 이 옷이 나을까, 저 옷이 나을까.” “립스틱은 더 빨개도 괜찮은가 봐줘.”
한참을 이리저리 꽃단장을 마치고 방문을 잠그다가 누군가 “아, 나 뭐 까먹고 안 갖고 나왔어.”
외출하기 1차 시도 실패.
방문에서 나와 현관문을 잠그다가 누군가 “아, 물 한 통만 갖고 나올까?”
외출하기 2차 시도 실패.
드디어 현관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대문을 여는데 “아차, 선글라스!”
3차 시도도 실패.
그렇게 우리는 건물 대문을 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4.
둘이 있어 무엇보다 좋은 건 둘이 합쳐 한 사람 몫을 할 때다.
가령 이런 경우다.
친구의 핸드폰 배터리가 소진되어 꺼지기 일보직전. 그럼 내 가 준비한 보조 배터리를 내민다. 그러나 아차! 핸드폰 호환 잭을 깜빡했다. 그럼 친구의 가방에서 호환 잭이 나온다.
“오, 통하였느냐.”
이러고 배시시 서로 웃고 만다.
길을 찾을 때는 더 유용하다. 사전 조사를 좋아하는 나는 이 동네에 뭐가 있는지 줄줄 외고 있지만 화장실 갔다가도 나올 때 길이 헷갈리는 지독한 길치다. 이 동네 정보를 들은 친구는 몸속에 내장된 방향 감각 레이더를 작동해 초행길임에도 목적지를 한 번에 찾아낸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는 또 한 번 배시시 웃는다. “둘이 합쳐 한 사람 몫밖에 못하는 건데, 이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1+1=1이지만 그래도 한 사람 몫은 하니까 성공 아닐까?” 키득키득. 결과 도출에 순이익을 내지는 못했지만, 원하는 결과는 손에 얻었으니 손해는 또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어쨌든 둘이라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