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과 죽음 그 사이에 놓인 상황같은 것은 아닐까
#1. 아주 조그마한 아기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비현실적이다. 꼬물꼬물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는 있지만 유리 벽만큼이나 그 움직임은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렇게 생긴 아기 더미(mock-up)를 본다 해도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은 느낌.
유선이는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진짜 엄마 말고 호적상의 엄마. 이제 슬슬 진짜 엄마가 되어가겠지. 한 밤중에 열이난 아이를 들쳐 매고 한걸음에 병원으로 직행할 것이고, 아이가 서서 첫 발을 내딛을 때 누구보다 감격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볼 것이고, 그렇게 학부모가 되고 사춘기 맞은 딸과 티격태격하고. 이게 더 비현실적이구나. 그래도 그녀는 잘 해 낼 것이다. 이렇게 덤덤하게 아이를 낳을 만큼 배포 좋은 그녀니까. 나도 단걸음에 거기까지 가 닿고 싶다. 나보다 멀리 가버린 그곳까지 얼른 닿고 싶다. 나도 모든 걸 경험하고 싶다. 부러운가 보다. 내가 무서워하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담담하게 해내는 그녀의 모습이 부럽다.
#2. 행복을 찾아서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 열다섯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럼 행복하지 않다면 죽어야 된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같을 길을 끝없이 맴도는 꼴이 되었다. 왜 사는 것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공부하고 밥 먹고 친구들과 수다 떠는 그것이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모님은 돈을 위해 하루하루 고통을 참고 있고 나는 끝없는 공부하는 기계 같았다. 그것이 사는 것일까.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삶에는 그것만이 다 일까.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삶에 대해 궁금했고 삶의 방법에 대해 궁금했고 삶의 목적이 궁금했다. 왜 사는가? 행복하고 싶어서. 그 당시 나는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었을까. 만화책 보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 그것은 단순한 쾌락이었고, 현재를 빠져나갈 수 있는 임시처였으며 공상이 허락된 방공호였다.
나중에 나의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살다가 보면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올 때가 있어. 삶은 안타깝게도 항상 행복할 수가 없어. 그래도 좌절해서는 안돼. 왜냐면 행복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본 적 있잖아. 그게 무슨 맛인지 기억하고 있지? 그래서 그걸 추구하면서 살아가면 돼. 행복을 찾아서.
#3. 탄생의 순간
단순한 일상 너머에 뭔가가 있다.
이 찜찜함이 오늘에서야 풀렸다. 열다섯에 궁금증을 발견했고, 잠깐 나는 잊고 있었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질문을 얻었고, 행복이 뭔지도 생각할 겨를도 없는 삶을 살다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지금, 찾지도 않았던, 그런 질문을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던 차에 그 쾌쾌 묵은 질문에 해답을 발견했다.
진리를 얻기 위해. 일상의 너머에 있는 진리를 찾기 위해 삶-고행이라고 왜 그러는지 알겠구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구나. 불교에서는 삶은 고다. 인생은 고. 고통을 수반한 힘듦. 그 고통을 너머서 열반에 이르고 그곳에 진리가 있는 것이구나.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다가 보면 열반의 지경에 이른다. 운동, 마라톤, 섹스, 아, 다 몸 쓰는 일이구나. 고통이 지나가면 아무런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 시기가 이르고, 그 범위를 넘어서면 벌어지는 활홀경. 그 치명적인 매력 때문에 섹스를 하는 것이겠지. 왜 신은 잉태라는 신성함 뒤로 오르가슴이라는 치명적인 황홀경을 섹스에 숨겨놓고, 과정 속에 미치기 일보직전이 돼버리는 고통을 숨겨놓았을까.
천국의 황홀경과 출산의 지옥을 모두 맛본 후에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맛봐야 한다. 훗날 아이가 겪게 될 인생의 달콤함과 쓴맛을 알려주기 위해 내가 미리 맛보는 것일까. 하나의 생명을 만들고 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 구성 재료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일까.
가장 치명적이었거나 격정적이었던 섹스를 마쳤을 때 임신이 잘된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식이라는 피곤했던 장기 레이스를 끝내고 얻는 꿀맛 같은 신혼여행에 허니문 베이비가 많은 법이고, 이렇게 안 생기는데 맘고생하지 말고 우리 그만 포기하자,라고 선언하며 울며 불며 서로를 다독이며 치러낸 그날 밤에 문득 임신이 되는 것처럼.
가장 빛나는 황홀경에 이르렀을 때, 그때 신의 계시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