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감사했어요. 당신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첫인상은 꼿꼿했다.
단아한 단발머리에는 연륜의 훈장쯤 되는 백발이 블리치처럼 새겨져 있었다.
푸릇한 젊은 아이의 싱그러움과 비교할 수 없는 우아한 오로라가 느껴졌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기품’이었던 것 같다.
몇몇의 팀들이 부서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 나의 보스보다 더 높은 직위를 가진 옆 팀의 그녀와 나의 첫 만남에서 그녀는 내게 처음으로 압박면접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이봐, 누구나 할 수 있는 사탕발림은 그만두는 게 좋아. 그보다 우리는 너의 본질과 판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인지가 궁금하다고.’
옥죄어오는 것은 없었다. 느긋하고도 점잖게 내가 가진 비전을 보고자 유도했다. 나의 보스보다 그녀가 훨씬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나도 모르게 기가 눌려버린 느낌이었다. 면접 잘 보는 편인데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나는 자리였으니까.
경력으로 입사하면 첫 번째 한 달은 평가대에 오른다. ‘얼마나 하나 보자’라는 눈길이 쏟아진다. 놀랍게도 옆자리의 그녀, 국장님은 나를 옆에 앉히고는 가장 큰 그림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지금까지 책이 만들어진 히스토리를 보여주며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네가 해보고 싶은 것들, 이곳에서 마음껏 펼쳐봐. 함께 만들어 가자.” 예민하고 날카로울 줄 알았던 그녀는 관대하고 따스했다. 모두에게 관심을 두었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프로젝트와 관련해 질문을 하며 담당자가 몰랐던 부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일을 하면서 주도권, 내 일과 너의 일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다르기에, 그 부분에 대한 경계가 흐트러지지 않으면서도 좋은 쪽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물꼬를 트여준다. ‘나이가 들면 아집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렇게 나이 듦이 가능하구나’ 놀라웠다.
이곳에 와서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모든 걸 아는 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도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이미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 점이 어떤 것인지. 모두가 내 작업이 잘되길 원하고, 어떤 도움이든 되길 원한다는 것. 그들은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모두 알고 있고, 물어봐주길 기다리고 있고 내 화보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고 있다. 그 점이 든든하고 고마웠다. ‘팀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처음으로 내 작업을 하는 것이 미친 듯이 재밌었다. 나의 보스는 아무런 잣대 없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관여하지 않았고, 나의 국장님은 무엇이든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없을까 체크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잣대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사람에 대해 좋은 면이 먼저 보인다고 한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표현할 줄 알고, 일을 즐기면서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을 매일 만나는 것이 즐거워야 하고, 일하는 곳의 분위기가 좋아야 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 내 사람들이 어떤 부분을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들이 더성장하기 위해서 해줘야 하는 일은 없는지 항상 관심 가지고 봐야 한다. 그것이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다. 위에 사람보다는 아랫사람들을 챙겨야 한다” 군자의 말씀을 전쟁터와 같은 회사에서 듣게 되다니. 그녀에게 우리는 식구고, 밥을 함께 먹는 사이고, 그 누구보다 편안하게 있을 공간과 시간을 함께 하는 사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어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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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을 함께 하는 지예. 지예의 서랍 속,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간식들.
미 국장님. 조용조용. 소곤소곤한 국장님. 그리고 이태원 중심.
그 중간에 이쁜 선배.
당신에게 나는 어떤 조각으로 기억되었을까. 행동하는 모든 것이 무의식 상태에서 이뤄지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것이 되었던들 행복하고 따스했으면 좋겠다.>
첫 한 달을 마친 내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런 그녀가 11년을 다녀온 이곳을 떠난다.
하나뿐인 그녀의 그를 위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위해 아주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일을 정리해오고 있었다고 했다. 평생 살 것처럼 살아가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는데, 나는 또 ‘나중에…’를 연발하며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들을 미뤄냈다. 우리는 ‘편한 시간에 맛있는 거 먹자’고 말해놓고는 갖고 있는 시간을 모두 다 썼다. 다행히 남은 성냥이 단 하나 있었던 것일까.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 전에 둘맘의 시간이 허락되었다. 열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지쳐있었다. 잘 참고 있다가 두세 달 전에 그녀에게 들켜버렸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숨겨두었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그런 내가 걱정이 되어 가는 순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말들을 아끼지 않는다.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점점 버티며 살아가게 되어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챙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맛있는 식사를 나누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빛과 소금과도 같은 이야기와 따스했던 분위기만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니까.
이틀 후인 생일 선물을 미리 받았다.
살아가면서 어른을 만나고, 그와 인연을 맺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나를 예뻐했고, 내 오랜 친구와 너무 닮은 그녀를 나는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다. 내가 친구처럼 장난쳐도 모두 받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녀의 퇴사 소식에 일을 그만둔 사람들까지 인사를 하려고 회사를 방문했다.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한 가지 바람이 있다고 했다.
“인상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
예전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점점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인상 좋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인상은 생각과 닿아있어서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삶이 좋아야 한다.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생각을 하고 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소녀의 순수함을 보았다.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직장의 분위기를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났다. 소곤소곤. 귀를 쫑긋 집중해야 들리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 그녀가 나를 불러도 못 듣는 경우가 많아 주변에서 알려줘야 그제야 그녀의 자리로 가지만 단 한 번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나오는 글을 읽고 알았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를 지니게 된 이유에 대해서.
“결혼하면 꼭 해외에서 달려오세요. 티켓 끊어드릴게요”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지만, 진심이다.
그때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소곤소곤한 목소리를 그대로이기를 바라며.
어느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강에 목욕을 하러 갔다. 일행이 강으로 걸어 내려갈 때 강둑에 있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자가 목욕을 하다가 목걸이를 분실했는데, 남자가 심하게 질책하자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사람들은 왜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가?”
제자들은 각자 다양한 이유를 내놓았으나 어느 대답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마침내 스승이 설명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더 커지는 것이다.”
스승은 이어서 말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랑을 하면 부드럽게 속삭인다. 두 가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큰소리로 외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지면 두 가슴의 거리가 사라져서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두 영혼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없이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사람들이 화를 낼 때와 사랑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