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롭게 비어로드 리뷰하려 했는데 어느새 색을 잃었다
삶은 생각했던 방향대로 가지 않는다.
생각은 생각했던 방향대로 느껴주질 않았다.
한량처럼 술독에 빠져 어린아이처럼 막무가내로 독일과 체코 프라하와 비엔나를 즐길 줄 알았는데
나는 어린아이로 가는 티켓을 잃어버린 듯하다.
술 취해서 카메라만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이정표를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아쉽게도 비어로드는 사진과 함께 아이폰에 추억이 고이 잠들어버렸다.
그저 가다가 끄적거린 글 한 줄만이 그때의 기억을 되새겨 줄 뿐이구나. 오늘도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01.
태국 방콕의 외국인 승려. 커다란 카멜 천을 두른 파란 눈 승려를 직원들이 귀인 보듯 대접한다. 뮌헨에서 10시간을 꼬박 날아온 주황 승복의 승려가 짐을 찾으러 컨베이너 벨트가 열 바퀴는 돌아야 나올 거 같은 곳으로 왔다. 그러자 그곳을 지키던 무표정의 직원이 서둘러 허리를 접는다. 임원진을 만났을 때의 당혹스러움이었달까, 아니 그건 '이런 누추한 곳에 계시다니요..'의 당혹스러움이었다. 서둘러 의자로 승려를 모신다. 두 손을 공손이 모으고는 연신 절을 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 친구. 승려는 천천히 옷을 다시 입어본다. 뫼비우스 띠처럼 베베꼬인 주황 네모진 천은 승려의 익숙한 몸놀림에 따라 옷의 모양새를 갖춘다. 계속 눈치를 보던 직원은 승려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속삭인다. 승려가 바코드 태그를 건넨다. 짐을 찾아올 테니 여기 계시라, 는 뜻이었구나. 승려는 아주 살짝 미소를 머금고 앉아있다 직원에게 다가간다. 짐에 대해 설명해준다. 10시간을 꼬박 날아오고 새벽 5시 45분에 본 이 모든 광경은 아쉽게도 내 짐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여기서 끝났다. 생경하면서도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진심에서 나오는 선의의 행동을 오랜만에 본 걸까. 피곤과 잠에 취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피곤과 잠을 빼앗아 가고 아름다운 풍경을 현실에서 만난 것 같았다. 짧지만 강렬한 찰나의 풍경.
02.
이제 모든 축제는 끝났고, 현실로 일상으로 돌아간다. 지독하게 바쁘겠지만 그동안 받아온 스트레스 때문에 막상 가면 즐거울 것으로 보인다
여행은 vacation이어야 즐거운 것도 있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일탈감 어떻게든 변화되는 일상과 생각들이 존재하니까.
03.
페루와 볼리비아. 남미.
어쩌면 다 같은 운명의 끈을 가지고 달고 태어난 걸까.
그 친구도 거기 갔었어. 예전에 한번 만났었는데 기억나? 어어 맞아 그 친구야. 다음 달이면 그녀를 닮은 예쁜 아기가 태어날 거야. 너는 그다음 달에 결혼을 하고 가정이라는 우주를 만들 거고. 이럴 때 보면 나는 꼭 뱀파이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모두의 삶이 바뀌는걸 같은 자리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 영생의 비극이 그런 거 아닐까. 내년 12월까지 아무도 없으면 나랑 결혼할래? 돈과 결혼을 우습게 생각했어 있어도 그만 해도 그만인 줄 알았는데 점점 그 무게가 커져만가. 어느 순간 눌릴 것 같아.
04.
행복했나.
갔다 와서 끝나는 시점에서 생각하니까
즐거웠다.
지나고 보면 그때의 시간들이 그 어떤 색을 갖게 되는데 하얗고 투명한 프리즘으로 비친다.
그러고 보면 즐거웠네. 많이 춥지도 않았고 마냥 웃으면서 즐거웠던 뮌헨. 옥토버 페스트 멤버들이 다 너무 좋았어서 마냥 웃다가 끝나가 끝나버렸다. 아름다운 꿈을 꾸고 난 다음의 기분이 이럴까. 그러고 보면 즐거웠는데 왜 나는 행복한 꿈을 꾸고 나서 죽음을 생각했을까. 빛 그 뒤로 그림자에 내가 자리를 옮긴 것인가. 아쉽지만 여기까지, 란 생각이 든다. 정리의 여행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비현실적인 여행이 시작된 거였구나. 아이러니했다. 굳이 오케이를 한 것이.
05.
모든 것이 색을 잃었다.
여행 때문은 아니었다.
여행이 지나고 찾아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