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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벌어지는 생각의 기록

휴지통에 넣을뻔 했네

by 피스타치오 재이

01.

“명명되지 않은 삶과 존재는 늘 가까이에 있었어요. 누락된 존재 블라 블라…”

‘다섯 개의 달’의 김성연 예술감독이 김하은의 인터뷰에서 던진 말이다. 나는 그것을 내 기사 글량 달라고 해서 아트팀에서 건네받은 예시 문장에서 발견했다. 명명되지 않은 삶이란 존재하던가. 그렇다면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런 이름표를 달아준다면 그 외의 사람들의 삶은 무엇으로 명명되는 것일까. 무엇이라 불리고 누군가는 불리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주민등록증 따위 없었던 듯 어디에도 존재가 걸려 있지 않은 사람들. 그러면 그것은 무엇으로 명명하는 것일까. 나의 직업이? ‘사회 속 나’로써 직업이 내 표식이라면, 그것을 지우고 나면 나는 무엇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자연인은 아닐 텐데.



02.

동생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가 뭐 필요한 책이 있냐고 물으니 <매력적인 대화법> 같은 책 하나 보고 싶단다. 요즘 말이 예전보다 잘 안 나온단다. 예전에도 매력적으로 대화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라고 말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그런 책이 있나? 대화법에 관련된 책 보다 매력적인 문체를 가진 작가의 책을 읽어보는 편이 낫지 않나. 읽다 보면 책에 동화되니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매력적인 대화법이라.. 그런 게 있나? ‘매력적인 대화법’이란 괜찮은 문장인 거 같아서 나중에 그런 책 하나 내보라고. 재밌는 이름이라 하니, “보링해”라고 말한다. 어제까지 읽고 있던 박정민의 <쓸만한 인간>을 추천해 줬다. 처음에는 약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오지만 끝에는 좋은 글들이 많으니 참고 읽으라는 주석을 달았다. 어라? 그 책 별로라고 생각해놓고 지금 생각나서 추천해주는 건 뭐람. 내가 요즘 느끼는 감정은 예전보다 내 글이 재미가 없어졌다는 점 정도? 뭔가 밋밋하게 흘러간다. 뭐 하나 툭 하고 건드려줘야 하는데 그런 게 발에 안 걸린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썼더라. 기억하려 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로 썼던 글들이 아니라 그냥 나를 건너 지나가는 감정들을 잡았던 것들이라, 방법이나 방식 같은 게 없었다. 그냥 왔다가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거니까.

아무튼 리퀘스트를 받았으니 전문가를 붙잡고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곁에 있는 피쳐 기자에게 물어본다. 매력적인 대화법에 관련된 책이 있냐고. 그게 뭐냐고, 먹는 거냐고 물어보는 눈빛이다. 억울하게 내가 뒤집어쓸 거 같아서 사실을 고한다. 여래 저래 해서 동생 놈이 물어봤다고. "아마,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끝을 흐린다. 일단 얘도 모른다는 거구나.

새로운 미션이 생겼다. 매력적인 대화법이라..

그리고 일기장에 이렇게 적음.

<그런 걸 적어놓은 책이 있나. 이건 마치 점성술에 대한 신비를 알려주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 거지. 그런 걸 책에서 찾으려고 하는 인간이 내 동생이었구나, 싶다. 그러면서도 꼭 찾아주고 싶네. 그리로 가는 길이 있으면 나도 데리고 가.>


03.

You Never Know

그럼 그렇고 말고. 알 리가 없지.

몇 주전부터 저 문장에 꽂혀 결국 그 노래를 찾았다. Sky High

노래는 한없이 나른한데 왜 스카이하이일까. 의미 없이 들었더니 모르겠다. 그냥 저렇게 나른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와 쿵짝거리는 리듬과 피아노 소리가, 아니

You never know. You just don’t know.라는 말이 좋았다. 넌 절대 몰라.

가사를 찾아봐도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문맹이 알리가 없지. 역시 사람은 돈 생김 배워야 돼. 돈이 없어도 배워야 돼.



04.

마감 때 오는 회사가 좋다. 머리를 써서 해야 하는 기획이 끝나고,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화보가 끝나고. 이제 모든 걸 정리만 하면 되는 시간이 온다. 그때부터 회사는 놀이터다. 그냥 놀러 오는 기분으로 오면 된다. 잠도 푹 자고 다음 기획을 준비하고. 이미 야근의 부지런함과 글을 쓰는 영민함이 아주 조금 돌아오는 때라서 몸에 활기가 생긴다. 다음 달은 무조건 미리 할 거야!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의욕이 불타올라 또 다 하지도 못할 일을 계획하고 다짐하곤 하지만. 그래, 저거 얼마 가겠냐, 지금 있는 의욕 그냥 즐기게 내버려두자,라고 생각이 들 따름이다.

얼마 안가.

나도 알아. 용두사미라는 거.

초반 러시의 선두주자. 나중에 끙끙댈 것을. 쳇



05.

당신 삶에서 아트 컬렉팅이란 무엇인가?


" 나에게 아트 컬렉팅은 영감을 채집하는 여행이다."

중국 부호 루쉰이 말했다.

영감의 채집.



나에겐 내가 집착하면서 모으고 있는 책 정도 되려나. 이상하게 책에 집착한다. 좋은 책을 더 읽고 싶고, 아름다운 책을 사 모으고 싶다. 책을 불사 지르는 그 사건처럼 모든 책을 팔아 해치우고 호주 가더니 이제 와서는 왠 이러나 싶다.


06.

<움직임은 빠르게. 감각적인 편집과 선택, 조합, 통일을 바탕으로 길게 늘어뜨리거나 가늘게 하거나, 가치 있는 시간은 유지하며 불필요한 요소들은 정리하고 중요한 요소는 강조한다.>


무슨 발렌티노 2017 SS 컬렉션 설명 자료가 이렇게 심오한가 싶다. 이것은 변역일까 한국 홍보팀의 첨부일까, 이래도 저래도 굉장히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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