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읽고 2
"아이에게 키스를 할 때, '아마 너는 내일 죽겠지'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여야 한다. 그것이 불길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아니라고 말한다. "불길한 말이 아니라, 자연의 한 과정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리를 베는 것도 불길한 것이 된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
사람이 죽는 일과 보리를 베는 일을 과연 누가 같은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너무 당치 않은 주장 아닌가.
그러나 자연의 차원에서 보면 새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일과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 보리가 베어지는 일보다 사람이 죽는 일이 어떻게 더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가.
자연의 차원에서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사람이 왜 자연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는가,라고 혹자는 물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죽음을 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또 죽음을 생각하더라도 두려워하면서 회피하고 싶어 한다. 혹은 죽음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면서 그 최악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그 길을 찾는다. 그 또한 두려움에 휩쌓여사는 일이 된다.
또한 질병은 깊어지고 나이는 늙어가는데 영원히 산다면, 그 또한 고달픈 일이요 형벌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을 순리요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도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온전히 살 수 있다.
또한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본다면, 아이에 대한 자신의 기대나 욕심에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순리로 받아들인다면 죽음은 언제 어디서고 떠올리기만 해도 우리의 삶을 그 겉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본질 속으로 데려가는 신성한 에너지다.
죽기 전에 죽어라는 말이 그 의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삶에 대한 탐욕이 전제된 것일진대 죽음에서 자유로운 마음은 또한 탐욕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어느 백만장자가 죽으면서 '다음 생에는 기본적인 경제만 충족되면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행복하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의미 있게 살고 싶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기본적인 경제가 어느 정도인지는 주관적으로 다르겠지만 돈을 벌고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살다가 죽을 때가 되니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새겨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일 죽을 것처럼 이 순간을 살라.
내일 죽을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좀 더 사랑하며 살라.
지금 자신에게 없는 것이
코앞에 크게 다가올지라도
없는 것을 채우느라 허우적거리며
삶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이라면
그 해야 할 것을 당당하게 해 가면서도
지금 이대로의 삶을 온전히 누리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존재의 소명이자 권리라고
아우렐리우스는 우리들을 깨워주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미 얻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삶에서 행복을 발견함으로써, 지금 바로 행복한 것은
살아있는 우리의 소명이자 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