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읽고

by 고요의 향기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아우렐리우스는 독촉한다.


"서둘러라."


​그가 말하는 서두름은 단순히 남은 생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체의 죽음보다,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고 인간의 도리를 살피는 '사유의 빛'이 먼저 꺼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인생의 남은 날이 날마다 줄어드는 것만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 해도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사물을 이해하고 신들과 인간을 두루 살필 수 있을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


​인간은 정신의 빛을 잃어도 숨 쉬고 먹으며 무언가를 바라는 본능적 능력은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헤아리고, 현상을 면밀히 검토하며, 고결한 숙고를 이어가는 '훈련된 사고'는 그보다 훨씬 먼저 사라지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 그래서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와서가 아니라 사물을 통찰하고 이해하는 작용이 죽음보다 먼저 멈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인가 이 즈음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전두엽의 중요성을 강조한 치매 전문 교수들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젊어서부터 읽고, 쓰고, 말하고, 공감하며 전두엽을 강화하는 작업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뇌 기능이 쇠퇴하더라도 저절로 선한 삶이 발현되도록 '뇌의 회로'를 깊숙이 내재화하는 과정이다.


진정성이 무의식적인 습관이 될 때까지 닦아온 이들에게는, 뇌의 빛이 희미해지더라도 자애로움이라는 고속도로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매는 그 사람의 껍질만 남긴다. 그 껍질이 분노가 될지 자애로움이 될지는 지금 얼마나 그 회로를 자주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죽음 앞에서도 숙의하는 자세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아우렐리우스의 서두름은, 내게 살아있는 자의 책무로 들려온다. 비록 뇌 기능이 떨어지더라도 내면의 평화와 자애의 삶이 절로 살아지도록, 자각의 빛이 선명한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정성껏 관장해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으로.


죽음의 시점은 내 권한 밖의 일이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는 오롯이 나의 권한 안에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깨어 있는 것, 안으로 행복을 가꾸고 밖으로 자비로운 언행으로 공동체를 살피는 일. 이것이 내게는 아우렐리우스가 남긴 정언명령처럼 느껴진다.


훗날 죽음이라는 선장이 나를 부르는 날,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나의 사유가 명료하게 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인지의 힘이 희미해진 자리에 원망과 분노, 정체 모를 저항이 들어앉지 않도록.


지금 바로 여기서, 자애로운 회로를 쉼 없이 닦으며 살아야 할 이유를 아우렐리우스는 '서둘러야 한다'는 속삭임으로 거듭 내 귓가를 두드리고 있다.


아침에 눈 떠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이 존재에게, 서로서로 그물맵처럼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마주하는 이들에게, 사람이 아니더라도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떠받쳐주는 순리의 존재들, 공기와 물, 햇볕 그리고 온 사물들에게 내 안의 사랑이 전해질 수 있도록 살아가야겠다고 긴 호흡을 들이쉰다.


참 신기하게도 저쪽으로 향하는 사랑이 가장 먼저 적시는 것은 자신의 심신이라는 것을 몸소 느낀다.


어쩌면 아우렐리우스가 서두른 것은 지혜이자 사유일지라도 끝끝내 자애로움으로 스스로를 적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창가에 어린 보드라운 햇살 한 줌을 보며 떠오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