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홀로 산속을 걷다

홀로 세상에 서다

by 고요의 향기

단순한 곳에 가면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직장에서는 누구의 선생으로 매일매일이 초고속 바퀴를 단 자동차처럼 달려갔고 녹초로 집에 오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자녀로 살았다. 머리 뒤통수에는 늘 그렇게 할 일이 꼬리를 달고 다녔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면 내 삶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였는지 어느 해 어느 날부터는 집 뒷산 커다란 참나무 아래에서 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가을이 지나갈 무렵까지 텐트 생활을 했었다. 텐트에 가면 해야 할 집안일도 없고 등도 없어서 어두웠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좋았다.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단출하게 그냥 있을 때 나는 마치 나 자신 속의 자연이 눈을 뜨는 것을 느낀다. 주변의 자연이 더 나를 자연으로 존재하도록 해주었다.


텐트에서는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눈을 뜨고 야밤의 바람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잤다. 바닥 냉기는 으슬으슬 추웠지만 2년 정도를 지속했을 때까지는 신기할 정도로 행복했다. 텐트 문을 열면 달이 얼마나 아름답게 비춰주든지, 산속 짐승들은 얼마나 가까이까지 왔다 가는지 그 발자국 소리가 여실히 다 들렸다. 신기하게도 그 발자국 소리들은 무섭기보다 생생한 존재의 기운을 느끼게 해 주었다. 파드닥 파다다닥, 달려 나가는 발자국 소리와 스르르르 바람 따라 날리는 낙엽 무더기 소리들, 이름 모를 새소리들까지.


그런데 지금 이곳은 평소 잘 알지도 못하는 산속이다. 달려갈 곳도 없고 달려와 줄 이도 없는 이곳은 정말 나를 온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산속이 세상보다 더 안전하다고 했다. 산속에서는 나쁜 사람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 동물로부터만 보호할 수 있으면 되니까. 사실 동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 텐트에서의 생활이 어쩌면 지금 나의 14일간의 가출에 용기를 부어 넣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산속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온전히 나로 존재하면서 오롯이 나를 위해 시간과 공간을 채워보고 싶었다. 드디어 그 삶을 실현해 볼 14일이란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은 생애 처음으로 혼자 걷는 산행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산길은 깊고 깊은 12 폭포로 이어져 있어 혼자서 산행을 하다 보면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멀리 가지 말라는 지인의 당부가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혼자 마주하기로 한 여행인데 당당하게 해 보자는 마음에서, 아니 사실은 해보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철저하고 신중하게 준비하는 마음 없이 그냥 무작정 덤비는 나의 무모함이 드러난 것이다. 지인이 추천하지 않은 폭포를 혼자 무작정 도전하게 되었다. 때마침 흐렸다. 유명한 산이어서 어제 낮에는 등산객이 꽤 많았는데 흐린 날씨로 인해 산행길은 한산했다.


한 폭포, 폭포를 만날 때마다 혼자서 햇살과 바람이 머무는 바위를 골라 누웠다가 손과 발, 얼굴을 적시기도 하면서 올라갔다. 세상이 심심한 듯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복잡한 마음이 싹 사라지고 내 존재의 소리에만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바람, 햇살, 나무들, 흐르는 계곡물, 바위들을 느끼면서 그것을 마주하는 일이 마치 내 존재의 깊은 영역과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듯한 평안함을 주었다. 그렇게 첫 등반의 출발은 상당히 신선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살아왔는가를 여실히 실감했다. 산속에서 간판을 놓쳐서 등산길을 놓친 것이다. 사실 그때가 되어서야 등산을 할 때 늘 함께 하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길을 찾아갔지 스스로 길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삶의 모든 것이 이렇게 이루어졌으리라. 혼자 사는 삶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는 행동으로 이어지리라. 가면 갈수록 아득히 길이 아닌 듯한, 낙엽이 푹 파이는 곳으로 걷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이 되었다. 한 시간 여를 헤매다가 결국 바람에 길이 사라지기 전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내려가다가 등산하는 가족을 만났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이 반가웠다. 길을 잃어도 함께 잃는 사람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결국 그 가족과 동행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한 친구처럼 속얘기까지 나누며 같이 사진도 찍었다. 내 마음이 친하게 느끼면 그것이 저쪽에까지 전달되는 것이 분명하다. 동행하는 남자는 '남자인 자신도 한 번도 혼자 등반해 본 적 없는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느냐'면서 놀라워했다. 그때는 내심 흐뭇했지만 다시 해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혼자 있는 곳을 특별히 좋아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유난히 시선을 뺏기는 성향을 가진 나로서는 혼자 있는 곳이 아니고서는 내면의 자신과 마주할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있을 때는 사람이 그곳을 가득 채우기에 공간도 온전히 만나지 못하는 것 같다. 혼자 있으며 조용히 침묵할 때 그때에야 내 속에 흐르는 자연이 주변의 공간과 모든 것들과 하나 되어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그때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 같은 충만함을 느낀다.

그제야 나에게 자연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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