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게서 배운다
아침에 눈을 떠 모기장 텐트를 열고 방문을 연다. 거실문을 열고 현관문을 연다. 슬리퍼를 마당 구석에 벗어 놓고 마당 한쪽에 있는 흔들 그네에 몸을 누인다. 이것은 내가 아침마다 하는 루틴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쉰다. 쉬겠다는 생각조차 않고 그냥 쉰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르는 그날의 한 마디가 있다.
'나무닭!'
세상이 온통 극도의 기후변화를 겪고 있다. 그중 일환으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생물들이 하나씩 하나씩 멸종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존재의 기반이 되는 다리들을 잃어가고 있다. 2025년 멸종위기 동물 인형 탈을 만들어 쓰고 거리 퍼레이드를 준비하면서 우리의 내면에 멸종되고 있는 그들을 되살려오자는 취지로 시작된 연수, 그 연수를 진행한 곳이 나무닭 움직임연구소였다.
연수중에 함께 식사를 하다가 누군가가 '왜 나무닭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물었다. 장자 이야기에 나오는 닭, 싸움닭 중에서 나무닭 같은 경지를 향하자는 뜻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대화가 가슴속 어느 구석에 남아있다가 고요해진 이 순간에 훌쩍 마음 밖으로 올라왔다.
닭싸움을 좋아하는 왕이 유명한 투계 조련사에게 싸움닭 한 마리를 주며 훈련을 부탁했습니다. 열흘 후, 왕이 그를 만나 물었습니다. “닭이 싸울 만한가?” 조련사가 말했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허세를 부리고 교만하여 자기가 최고인 줄 압니다.” 왕은 열흘을 기다렸다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조련사가 답했습니다. “아직 덜 되었습니다. 교만은 버렸으나 상대의 소리와 그림자에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열흘 후 또다시 묻는 왕에게 조련사는 말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를 보는 눈초리가 너무 매섭습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금 묻자, 마침내 조련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상대가 다가와 소리를 질러도 반응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합니다. 마치 나무로 만든 닭처럼 그 덕이 완전합니다.”<장자>의 <달생편> 중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싸움닭을 ‘나무닭(木鷄)’에 비유한 장자의 이야기는 참으로 놀랍다. 교만하지 않고, 상대에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나무닭. 흔히 연상되는 싸움닭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듯하지만 다른 닭들은 이 닭을 바라보기만 해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왕이 싸움닭을 찾았기에 싸움닭으로서도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닭이지만 실은 주변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가진 존재가 나무닭이다.
그 나무닭을 내 삶 속에 비추어 본다.
허세와 교만이 첫 번째 버려야 할 덕목이라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허세까지는 모르겠지만 교만이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같은 나이인데도 승진을 추구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앉은 친구를 볼 때나, 사회적으로 유망한 사람을 볼 때, 인생의 죽음을 떠올리면 그들이 내려놓을 것들이 나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누군가가 들여다보면 어이없을 교만을 부리곤 한다.
평상심,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을, 흔들려도 바로 회복될 항상성을 내 안에서 찾아왔다는 것에 대해서 안도감을 가지곤 한다. 그러나 그 안도감 또한 어떤 순간에는 교만심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너에게는 그것이 있니, 나에게는 이것이 있다'는 마음, 그것에 대체하여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일명 교만닭이다.
교만이 자기의 한 면에 지나치게 높은 점수를 매기는 마음이라면 열등은 다른 면에 지나치게 낮은 점수를 매기는 마음으로 모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림자의 결과물이자 인정욕구가 결핍된 흔적이다.
무엇이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무엇이든 나보다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모든 존재의 본질 안에 평상심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교만과 열등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아무 일 없는 항상성이 회복된다는 것을 안다면 어느 누구도 교만할 이유도, 열등할 이유도 없다. 그냥 자기대로의 한 걸음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타인의 반응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지점이다. 그런 인격을 유리그릇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리처럼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어지고 그 소리도 크게 나는 일명 유리닭이다.
유리인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고 불행하게 할 수 있다. 그 유리인품을 밖으로 투사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했기 때문에 내가 이런다'면서 자신의 민감함과 유약함을 회피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상대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싸우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평상심으로 존재하면서 그 평상심이 드러난 눈길인가를 묻고 있다. 그 닭이 바로 나무닭이다.
교만할 것도, 열등할 것도 없고 이대로의 이 삶 속에서 자기대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걸음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걷는 길, 주변에서 이리저리 흔들어대도 큰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평상심이 드러난 온화한 눈길과 표정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어떨까.
혹여 그렇지 못하게 살아왔다면 그 또한 한 밤의 꿈처럼 번쩍 깨어나 아무 일 아닌 일처럼 다시 걸어가면 된다. '그것은 꿈이 아니고 사실이야' 하는 사실감이 강할수록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