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함을 돌아보며
내 인생의 무수한 갈등 중의 하나는 내면의 엄격함에서 출발한다. 하기로 했던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상대방의 신뢰를 확인하는 행동이 되었다. 더불어 아이들에게는 이 신뢰 회복이 인생을 살아가는 첫 지침이라고 여겨져 더 통제하게 되었다.
이 엄격함은 어디서부터 출발하게 된 걸까,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던 나는 해야 할 것을 하고 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세상을 위해서 해야 할 가장 기본이라고 스스로에게 읊으면서 살아오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함께 약속한 대로 일어나 하기로 한 것을 바로 시작하지 않고 늦게서야 푸석한 눈으로 일어난 막내딸이 묻는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거야, 언제부터 하는 거야?"
아니, 이 아이는 어제 했던 말을 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가 필요한 대로 바꾸는 것일까,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이미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다 확인하고 약속까지 해놓고서 지금 그게 해야 할 말이냐?"
감정의 강도는 3 정도였으나 표현은 5 정도로 했던 것 같다. 얼굴 쪽에서부터 긴장되는 것을 느낀다.
아이가 스스로 행동하도록 하려면 좀 더 정확하게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고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을 괴롭히지? 나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대로라면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고쳐주고 바른 행동을 바로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면서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약속을 다시 받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자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나친 엄격함에 대해서. 아이와의 관계를 의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내가 원하는 삶을 방해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아이를 대하는 일 또한 나에게는 의무였던 것이다.
아이가 자기대로 흘러가는 삶이 나를 괴롭히는 일이라니, 그렇다면 아이가 약속한 대로만 산다면 아이와의 관계는 그대로 충분한 것일까. 약속한 대로 해서 나를 더 힘들게 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식의 관계라면 아이와의 관계는 피곤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내가 아이를 피곤해하고 있었구나. 아이를 피곤한 존재로 여기며 살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려진다.
그 상황에서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도 해야 할 일 말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그런 욕구였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 안아주고 격려하며 응원하는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 깊은 가슴속에 가로막혀 있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이를 단죄하고 통제하는 사람으로 역할하고 있었구나. 아이와의 갈등이 통째로 이해가 간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된다면 아이의 느낌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필요한, 지혜로운 행동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가는 신뢰롭고 다정한 동반자가 되고 싶다. 적어도 아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먼저 보듬어주면서 말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 자아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대상에게 바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욕구를 그에게 투사해서 그와의 관계에서 이를 충족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과정이 아니다. 의식적으로는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그를 위한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통제받지 않고 강요받지 않은 스스로의 욕구를 내비칠 때 이미 이야기한 약속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거나 실망해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원했던, 아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의무적인 삶의 태도를 아이에게 투사하면서 아이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었구나 스스로 알아차려진다. 일상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 화는 어쩌면 이런 긴장과 에너지 쓰임이 안으로 눌려있어서 저절로 튀어나오는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속단하고 단죄하며 미워하던 마음이 안으로 잦아들고 이내 미안함이 잔잔히 느껴져 온다.
이 미안함은 다만 내가 만나는 그네들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이리라. 무수한 삶을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해냈던, 그러나 정작 즐겁지 만은, 의미롭지만은 않았던 지난 세월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토닥토닥 다독여본다.